손수건 / 김응숙
긴 나무의자 한쪽에 손수건이 놓여 있다. 청회색에 흰 꽃무늬가 나염 된 여자 손수건이다. 시골 역 플랫폼에는 저 멀리 학생 두엇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뿐 무심한 오후의 햇살만이 손수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임자인 듯해 보이는 이는 눈에 띄지 않는다. 왠지 네 귀가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에 자꾸 나의 시선이 머문다.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괜한 생각을 한다. 나는 흘린 편지를 줍듯 손수건을 주워 든다.
초등학교 입학식 전날 어머니는 하얀 포플린 천을 잘라 손수건을 만들었다. 사방 한 자 남짓한 정사각형의 가를 공 굴리기로 꼼꼼히 바느질 한 뒤 가로로 두 번, 세로로 한 번 접어 다리미로 꾹 눌렀다. 그리고는 입학식 때 입기 위해 사놓은 노란색 원피스 앞섶에 옷핀으로 달아 놓았다.
손수건은 무슨 패스포트인 양 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가슴마다에 당당하게 달려 있었다. 크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흰 손수건이었다. 어머니는 미리 배정된 반 팻말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내게로 다가와 옷매무새와 함께 손수건도 반듯하게 만져 주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설움에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어머니는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손수건을 쓸어내리던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코를 흘리거나 더러운 얼룩이 묻었을 때 깨끗하게 닦기 위해 손수건을 달고 다닌다고 했다. 늘 코를 찔찔 흘리던 내 친구는 콧물이 굳어 꼬깃꼬깃해진 손수건으로 연신 코를 닦아댔다. 왠지 늘 보아오던 친구의 얼굴에 묻은 콧물이 처음으로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오기 전 동네 공터에서 어울려 놀 때에는 콧물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나없이 소매 끝으로 쓱 닦으면 그만이었다. 소매 끝이 콧물로 반질반질해져도, 허연 콧물 자국이 얼굴에 남아 있어도 우리는 신이 나기만 했다. 그러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깔깔대며 웃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학생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학생은 자신의 콧물 자국이나 더러운 얼룩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보았다. 어쩌면 손수건으로 닦는 그 순간부터 그런 것들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학생이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자꾸만 생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꿀물보다도 달콤한 아침잠, 배고픈 것도 잊게 하는 만화책,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무심코 지나쳐 버린 선생님, 친구들과 놀다가 미처 다하지 못한 숙제들이 학교에서는 수시로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붉은 작대기가 비 오듯 그어진 시험지, 제때에 남부 하지 못한 공납금 봉투, 한 번에 다 외우지 못한 국민교육헌장 때문에 복도에서 벌을 설 때면 괜히 눈물이 나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런 것들을 이미 다 아시고 손수건을 달아 주었던 것일까.
언제까지 손수건을 달고 다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다. 처음 구두를 신고 외출한 날 버스 정류장에서 넘어졌을 때 황망히 일어나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남몰래 닦은 것도 손수건이었다.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날, 친구와의 오해를 끝끝내 풀지 못한 날, 막연한 연정이 사랑이었음을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깨달은 날, 헤어보면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수한 날들의 아픔과 상실의 얼룩들을 손수건은 그 가벼운 몸피로 남몰래 닦아 주었다.
얼룩을 지우는 걸로는 걸레만 한 것이 없다. 걸레는 대범하다. 웬만큼 큰 얼룩에도 눈도 꿈쩍 않는다. 망설임 없이 힘껏 북북 문질러 깨끗이 지워버린다. 하지만 너무 적나라하다. 한쪽에 씩씩거리며 널브러져 있는 걸레는 나의 얼룩이 얼마나 더러운 것이었나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도무지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 상대방이야 수치심을 느끼든 말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다.
충실하기로는 수건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수건은 걸레와는 달리 적절히 자신을 조절할 줄을 안다. 성실한 집사와도 같다. 그런데 좀 메마른 느낌이다. 수건으로 닦고 난 뒤의 뽀송한 느낌은 개운하면서도 어쩐지 허전하다. 비록 얼룩이었으나 흔적마저 사라져버려 추억할 길조차 없어진 서운함이라고나 할까.
손수건은 조용하다. 탓을 하지도 않거니와 편을 들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위로를 건넬 뿐이다. 차마 남 앞에서 드러낼 수 없었던 얼룩들을 속 깊은 누이처럼 닦아주고 덮어준다. 그리고는 다시 네 귀를 반듯하게 접어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집에 돌아와 빨려고 펼쳐 들었을 때에는 어김없이 남아있는 체취와 흔적들로 그 순간들을 기억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잎처럼 그저 물살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는 것으로써 남아있는 얼룩의 잔영들을 씻어낸다. 충분히 품었으므로 미련은 없다. 이제 손수건은 처음 가슴에 달았던 것처럼 깨끗해진다..
한가로운 오후, 햇살만이 가득한 시골 역 플랫폼에서 우연히 주워 든 손수건 한 장을 들고, 이 가벼운 것을 들고 기차가 도착 때까지 나는 긴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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