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15극장 / 박금아

15극장 / 박금아

 

 

 

우리 동네에는 특별한 극장이 있다. 신림6동 시장 안, 작은 가게가 그곳이다. 매일 아침 여덟 시에 시작해서 저녁 여섯 시까지 이십여 년째 공연을 이어오지만, 똑같은 작품을 올린 적이 없다.

극장 문을 열면 어두컴컴한 서너 평의 공간이 나타난다. 가운데에 놓인 연탄난로에서는 양은 주전자가 끓고 있고, 벽에는 쌀 튀밥과 강냉이와 누룽지 튀긴 것을 담은 양파 자루들이 겨울잠 자는 박쥐마냥 드레드레 달려 있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가게 안이 자세히 들여다보인다. 문 입구 바닥에 뻥튀기 재료를 담은 양철통이 줄지어 놓여 있다. , 율무 같은 곡식과 우엉, 무같이 채소를 말린 것들이다.

안쪽 구석에 작은 구들이 있다. 담요 한 장을 반으로 접어놓은 크기의 그 자리는 관람석이 되기도 하고 무대가 되기도 한다. 뻥튀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손님들은 가게 주인 김 씨가 하는 공연을 보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기도 한다. 처음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있기 예사다. 오늘도 아주머니 세 명이 얇은 담요 한 장을 나눠 덥고서 동상이몽으로 앉아 있다.

"찰크락!"

김 씨가 뻥튀기 기계에 가스 불을 붙이고 압력 레버를 잠그는 소리다. 이 신호를 시작으로 15분 동안의 공연이 펼쳐진다.

"장사를 마치고 나면 재워주는 집들이 많았어요. 그중 늙은 벙어리 남편과 젊은 마늘각시 부부가 젤로 생각나요. 금슬이 참 좋았어요. 그런데 두 사람의 사연이 궁금해요. 알고 보니 가난한 친정을 살리려고 부잣집으로 시집온 거야."

이야기는 1950년대 초, 배고팠던 시절로 올라간다.

"아이 셋을 두었는데 이름이 재밌어요. 첫 아이는 우연히 생겼다고 '우연', 둘째는 자연히 생겨서 '자연', 세찌는 기분 좋게 만들었다고 '기분'이라고 지었던 거라."

관중 속에서 키드득키드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훤칠한 키에 근육질 몸매, 부리부리한 눈매가 시선을 잡아당긴다. 늡늡한 성격에 능갈치는 재주까지 갖추었으니 15분이 언제 갔는지 모르게 훌쩍 지난다. 그 시간이면 압력기의 눈금이 정확히 110도를 가리키고 뻥튀기가 터져 나온다.

김 씨는 기계에 불을 올리며 손님들의 마음에도 군불을 지핀다는 생각을 한다. 댕돌같은 곡식 낱알들을 뻥튀기하려면 차가운 고철 덩어리가 100도 넘는 온도를 품어야 하듯이,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에도 체온을 넘는 열기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계를 돌리기 전에 그가 늘 묻는 말이 있다. 뻥튀기를 먹을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처음엔 손님들 대부분이 별걸 다 묻는다는 투로 묵묵부답이다. 김 씨는 먹을 사람에 따라 압력을 다르게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할머니가 먹을 쌀알은 부드러워야 하고 손주가 먹을 것은 덜 튀긴 것이 좋단다. 노인은 달착지근한 것을 좋아하지만, 젊은 여인들은 사카린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곁들인다. 가족 중에 당뇨가 있는지, 비만 환자는 없는지, 치아 상태까지 확인한다.

이쯤 되면 배겨낼 재간이 없다. 세상 귀찮으니 말 시키지 말라고 입 꾹 다물고서 버티기 자세로 있던 이들도 슬슬 입을 열게 된다. 손님들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으니 오늘은 불쏘시개에 불이 빨리 댕겨진 셈이다. 공연 시작이 빨라졌다.

보통은 김 씨가 배우이지만 손님이 대신할 때도 있다. 나도 두어 번 배우가 되어 본 적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다 보면 처음엔 쭈뼛거려지다가도 점점 소리를 높이게 되고, 관객들은 배우의 삶에 자신을 빗대면서 시나브로 몸과 마음을 끄덕이게 된다. 그 온기가 표정으로, 눈빛으로 때로는 목소리에 담겨 나와서 극장 안은 배우의 열변과 관객의 추임새까지 합하여 열기가 절정이 된다.

그맘때면 소리를 높여가며 변죽을 울리던 기계 소리도 최고조에 다다른다. 압력기의 바늘이 큰 폭으로 흔들리다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면 김 씨의 동작이 다급해진다. 뻥튀기 망을 준비하고 가스불을 뺀다. 마침내 눈금이 110을 가리키는 순간에 이르면 시장통을 향해 소리를 치면서 압력밸브를 열어젖힌다. "뻥이요!" 고철 덩어리에서 꽃밥이 터져 나오고, 멀리 관악산 호압사 산문에 기대어 선 조팝나무에서 '! !' 흰 쌀 꽃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환한 싸리 꽃밭이다. 손님들의 속도 모두 '!' 터져서는 갓 쪄낸 유월 햇감자 속처럼 파근파근하니 환골탈태한다. 그러면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튀밥 봉지를 챙겨 들고 극장 문을 나선다. 조팝꽃처럼 포슬포슬하니 피어 집을 향해 왜죽걸음으로 팔을 홰홰 내저으며 빠르게 걸어가는 몸짓이 가볍다 못해 경망스러울 정도다.

수십 년 동안 뻥튀기를 하며 김 씨가 얻은 철학이 있다. 곡물 한 됫박을 넣고 15분 동안 기계를 돌리다 보면 아무리 힘든 마음도 평상심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슬찬 깨달음이랄까. 종심從心에 이르렀으니 공자의 말대로 모질음 쓰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하여도 규율이나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를 만도 하다.

마음에 왜바람 불어오는 날이면 나는 곡식 한 됫박 챙겨 들고 신림6동 시장 골목 '15극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