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잠망의 시간 / 김옥한
붉은 털실 매단 잠망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리본 묶은 갈래머리 계집애 같다. 구멍 숭숭 뚫린 망 사이로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놓은 듯 거미줄이 어지럽다. 잠망은 왜 이제야 왔냐고 슬쩍 나무라는 듯하다. 붉은 리본 사이로 젊은 아버지가 빙그레 웃고 있다.
고향 집을 허문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길이었다. 집은 굴착기 앞에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양잠을 하여 학교만큼이나 큰 규모의 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십 년 동안 비어 있었다. 안방과 사랑방을 뒤지며 추억이 될 만한 물건들을 한데 모으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창고였다. 뜻밖에도 누에치던 물품들이 가득했다. 뽕을 잘게 썰던 뽕칼을 비롯하여 둥우리와 다래끼, 잠박과 잠망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 붉은 리본을 단 누에 그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잠망은 누에 자리를 갈거나 옮길 때 사용되는 새끼로 꼬아 만든 그물이다. 누에 위에 잠망을 덮고 뽕잎을 주면 누에가 배를 채우기 위해 잠망 위로 올라온다. 뽕 찌꺼기와 배설물은 망 사이로 빠져 누에가 자라는 동안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겉보기에는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양잠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물건이다.
초등학교 때 잠망 만드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가 꼰 새끼를 사각 틀 양옆 스무 개의 못에 가로로 걸고 새로 줄로 엮어 고정한 후 그물처럼 만들었다. 간격을 일정하게 맞추고 촘촘히 잡아당겨 고르게 해야 좋은 잠망이 되었다. 나는 잠망 짜는 것이 싫어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야단 대신 두 언니보다 더 잘 만든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때부터 우쭐해져 마무리한 잠망 귀퉁이에 붉은 털실을 끼워 리본처럼 묶었다. 언니들이 만든 것과 구분 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마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잠망 만드는 일과 누에치는 일이 정말 싫었다.
아침에 누에똥을 가릴 때면 똥과 잠망이 함께 밖으로 버려진다. 빨리 꺼내지 않으면 분비물이 태산처럼 쌓여 꺼내기가 힘들게 된다. 재빨리 잠망만 추려 처마 밑에 차곡차곡 쌓은 후에야 학교로 갈 수 있었다. 일 욕심 많은 아버지 때문에 정신없이 도와주다 지각하는 일도 잦았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누에똥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럴 때면 왜 우리는 누에를 치느냐고 애먼 엄마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우린 누에였고, 아버지는 잠망이었다. 바지런한 아버지는 절약과 검소함으로 일밖에 몰랐지만 우리에겐 소홀함이 없었다. 열한 명이나 되는 식구의 생계를 감당하면서도 매년 억척스럽게 농지를 사들였다. 자식들이 결혼해서 분가하게 되면 땅과 집을 물려주는 것이 아버지의 목표였다. 혹 고향에 내려와 살게 되면 그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한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스무 살 나이에 푸른 꿈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다. 갖은 고생 끝에 모은 돈으로 양말 공장을 차렸다. 돈벌이가 제법 잘 되던 스물두 살 때, 열일곱 살 어머니를 만났다. 그것도 이국땅에서 만났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광복이 되자 부모님은 삼 남매를 데리고 십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안정되면 다시 가리라 생각하고 빈손으로 왔다가 돌아가지 못했다.
정부로부터 적산가옥을 불하받아 지금의 집에 터를 잡았다. 매년 토지의 평수가 늘어나 형편이 나아졌다. 뒤늦게 농사를 배웠으나 수익에 대한 계산이 밝아서 모두가 선호하는 소출 적은 벼농사보다 양잠을 택했다. 우리 집은 사방이 뽕나무로 둘러싸여 동네에서 뽕나무 집이라고 불렀다.
양잠은 뻥튀기 기계처럼 부푼다. 누에씨를 처음 가져올 때는 방 한 귀퉁이만 차지하는데, 초잠을 자고 두 잠, 석 잠을 자고 나면 애벌레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난다. 마지막 넉 잠을 잔 후 허물을 벗고 나면 그때부터 누에는 일생 동안 먹는 양의 구십 퍼센터를 먹는다. 뽕잎도 거기에 비례하여 준비해야 하므로 전쟁을 방불케 했다. 작은 점처럼 까맣게 꼬물거리던 것이 하얗고 통통한, 어른 손가락보다 커지면 학교보다 큰 잠실은 누에로 가득 찼다.
내가 고둥학교 삼 학년 때였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에게 먹구름이 드리웠다. 가을누에 고치를 팔러 간 오빠가 돌아오지 않았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시골에 고치 수매가 시작되면 술집과 색시집이 많이 생겨났다. 아버지는 온 동네를 이 잡듯 뒤졌으나 허사였다. 오빠는 그 날 받은 돈을 몽땅 들고 서울로 가벼렸다. 그런 후 수년간 돌아오지 않았다. 막대한 인건비와 농사비용은 물론이고, 수확을 예상하여 미리 사들인 땅값에 대한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 번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가 초라해진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여고 졸업을 앞둔 때였다. 소나무 껍질보다 거친 감촉이 당신의 살아온 날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대학을 포기하라며 글썽이는 눈으로 말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 후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없을 것 같던 아버지는 점점 나약해져 갔다. 봄이 되자 나는 다시 누에치는 일을 도왔다.
오빠의 가출 후 아버지는 술로 화를 달랬다. 타고난 건강으로 오래 살게 될 거라 믿었는데 황달이 나타났다. 검진 결과 담도에 혹이 생겼다고 했다. 좋은 의술도 깊어진 병에는 어쩔 수 없었다. 엄마와 한날한시에 죽자며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먼저 밥술을 놓으셨다.
잠망을 챙겨들었다. 남편은 쓸데없는 걸 가져간다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이라 두고 갈 수 없었다. 누에가 뽕을 먹고, 잠을 자고, 허물을 벗고, 자라서 고치를 짓게 해준 것처럼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잠망이 되었다.
촘촘한 방 사이로 정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귀퉁이에 빨간 실 묶은 잠망, 니가 만든 거 맞제? 참 잘 만들었네.” 먼지 푸석거리는 아버지를 품에 꼭 안아본다. 허물어져가는 집 모퉁이, 고치 같은 목련이 하얗게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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