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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촌부의 송덕비 / 신성애

촌부의 송덕비 / 신성애

 

 

화사한 꽃잎이 봄바람에 흩어진다. 저만치 젊은 내외가 복숭아꽃을 솎아내며 농사 준비에 분주하다. 발길을 멈추고 손 인사를 하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밭 끄트머리로 올라선다. 밭둑에는 손을 타지 않은 쑥이랑 달래가 지천으로 깔렸다. 멀리 가산산성이 보이고 구릉으로 둘러싸인 과수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산골짝 비탈진 땅을 일구어 만들어낸 농장은 동네와 떨어진 곳에 널따랗게 자리 잡았다. 어디에선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본다. 따스한 봄날, 무덤가에 세워진 검은 돌의 송덕비가 햇살에 반짝인다. 누구일까. 커다란 상석에 우뚝 선 비를 보니 예사 사람은 아닌가 보다.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비문을 읽어 내려간다. 부림 홍공 연진 공덕비라 쓰인 뒷면에는 그 사람의 살아온 이력과 행적이 들어 있다.

자수성가한 재물을 마을에 내놓고 경로회의 자금으로 논을 희사했으며 자식들을 훌륭하게 건사했다는 내용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칭송하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세운 공덕비는 쭉 뻗은 글씨체가 반듯하기 그지없다. 본받을 만한 선조가 있다는 건 자손들에게는 무한한 자긍심이 되리라.

자랑스러운 선조를 둔 후손들은 몸가짐조차 남다른 걸까. 과수원을 내려오며 훌륭한 조상을 두셨다고 알은체 하자 손사래를 친다. 같은 성씨인데 잘못 알고 말한 걸까. 휘둥그레진 눈으로 산의 초입에 자리한 송덕비를 보았다는 말에 벌레 씹은 얼굴이 된다. 무덤의 주인공이 모르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머쓱해서 돌아서는데

'남사스러워서 죽겠심더. 남들이 해준 게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세운 거예요.' 다짜고짜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부부가 얼굴을 붉힌다. 본인이 세운 생 비라니, 자식이 보기에는 껄끄러울 수도 있겠다. 동네와 노인회를 위해 좋은 일을 했건만 표식이 없으니 손수 가묘를 하고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하기야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기려 하지 않는가.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으로 끙끙 앓기보단 화끈하게 자신의 행적을 비석에 남긴 촌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농부에게 땅은 자신의 분신, 어쩌면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피 땀으로 이룬 재물을 내놓을 땐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왜 없었을까. 꿀 먹은 듯 입을 쓱 닫고 모른 체했으니 조금은 서운했을 것이다. 누구도 해주지 않는 송덕비를 세우고 노인은 얼마나 뿌듯했을까. 누가 이 촌부처럼 자신의 인생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떳떳하게 살았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비록 지금의 고갯길로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지만, 한세상 이만큼 살았다고 후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송덕비 비판론이 있다. 첫째는 수령이 학정이나 무능을 윗사람들에게 감추기 위해 사람을 매수해 세우는 경우이고, 둘째는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널리 할당해 한몫 챙기는 수단으로 세우는 경우, 셋째는 중간 간신 배가 송덕비를 세워두고 이를 미끼로 이권을 챙기는 경우라고 했다.

하지만 옛날 탐관오리들의 얼토당토않는 송덕비에 비기랴. 촌부의 송덕비라고 괜히 트집 잡을 일이 아니다. 그 비석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실행을 갖추었느냐가 문제일 뿐. 송덕비 앞에서 더 이상 자손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선뜻 토지를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말로만 내는 생색도 어려운 일이거늘 몸소 힘들게 모은 재물을 내놓기가 쉬운 일인가. 골짜기의 이웃을 위해 앞장서 일했다는 걸 외면해서는 안 된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직도 경운기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닌다. 농로를 넓히고 포장하려 했지만 그 누구도 밭떼기를 내놓지 않았다. 촌부는 마을을 위해 애를 썼건만 돌아온 건 동네 사람의 무관심이었다. 그들에게는 배려하는 마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게 아닐까. 자신의 생 앞에 부끄러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정말 오래 남고 싶으면 사람들이 대대로 입으로 전하는 구비를 세울 일이다. 유구무언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면 같은 말이라도 가히 쓸모 있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유구개비다. 곧 사람들의 입이 모두 송덕비와 같다는 뜻으로 칭송이 자자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물음표 하나 가슴에 안고 과수원을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