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꼬 / 김옥한
담뱃불이 깜빡이며 도랑을 왔다 갔다 했다. 내일은 모를 내는 날이라 밤새 아버지가 물꼬를 지키고 있다. 며칠 전부터 수리조합 감독에게 모심는 날을 알려 주었기에 그날 도랑에 흐르는 물은 우리 우선이었다. 일할 사람 다 맞추어 놓고 물을 대는데 가끔씩 새치기하는 사람이 중간에 물꼬를 트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흙으로 된 봇도랑은 유실되는 물이 많았다. 강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다. 큰 양수기로 물을 푸면 봇도랑이 가득 차고 넉넉하지만 쥐나 두더지가 낸 구멍으로 인해 터지는 수가 있어 위험했다. 주로 작은 양수기로 푸니 아래쪽 우리 논은 물이 조금씩 내려오거나 아예 끊겨 버렸다. 적은 양의 물을 서로 대려 하니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가뭄으로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면 아버지 마음도 함께 타들어 갔다. 물이 급할 때는 이웃, 친척 간에도 양보가 없었다. 물을 제때 대지 못하면 벼가 영글지 못하고 허옇게 쭉정이가 되어 일 년 농사를 망치기 때문이었다. 모내기철이면 사람들은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져 사소한 일에도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많았다.
암체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한번은 우리 논 아래 사람이 막대기로 구멍을 뚫어 비료 친 물을 자기 논으로 빼냈다. 낮에는 들킬까 봐 한밤중에 몰래 그랬던 것이다. 들판에서 고성이 오가고 삽날이 하늘을 향했다. 당시에는 비료가 배급제여서 쌀처럼 귀했는데 땅이 비료를 흡수하기도 전에 빼내가니 양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혼 시절, 시댁에서 몇 달간 지냈다. 시어머니는 농사가 많아 매번 필요한 일꾼들과 농기계를 맞추느라 동분서주했다. 날이 붐하면 들에 나가고, 때가 되면 점심을 준비해 갔다. 새댁인 나는 들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는데, 어느 날 물꼬를 부탁했다.
“잠시만 눈 돌리면 주변 논 사람들이 물꼬를 돌리니 잘 지켜야 한다. 다른 논물을 보러 가야 하니 피아골 논 물꼬 옆에 앉아 있어라.”
날이 어둑해질 무렵 인기척이 났다. 이웃에 사는 어른이었다. 인사를 드리니 건성으로 받으며 시선은 우리 논을 향했다. 잠시 뒤 물이 제법 들었다며 우리 쪽 물꼬를 반쯤 막고는 자기 논 쪽으로 물길을 돌렸다. 논두렁을 틔워 흙이 패이지 않게 비닐을 씌우곤 그곳으로 물을 채웠다. 우리 논 여섯 뙤기 중, 아래 다섯 뙤기는 도랑이 없어서 위쪽 논을 거쳐야 아래쪽 논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새댁이라 말도 못 하고 그저 지켜보며 애간장만 태웠다.
어른이 돌아 간 후 때마침 어머님이 왔다. 오자마자 물꼬를 걷어 젖히곤, 그저께 물을 댔는데 이런 경우가 없다며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아래쪽 논까지 물이 시원하게 콸꽐 들어가자 그제야 초조하던 마음이 놓였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갈 때와 자식 입에 밥 들어갈 때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 새삼 생각났다.
새참을 먹을 때면 오가는 사람은 물론, 불편했던 논 이웃도 다 모였다.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들이 국수 한 그릇에 화해가 된다. 좁은 논둑에 서로 자리를 좁히고 앉으면 새록새록 인정이 쌓인다. 그때쯤이면 장떡과 분이 나는 감자도 한 솥 쪄서 내온다. 새참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막걸리다. 물꼬를 다툰 감정도, 할경으로 인한 시비도 막걸리에 섞여 휘휘 저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풀어졌다.
논둑에 둘러앉아 맛있게 못밥을 먹을 즈음, 그제야 다리에 달라붙은 거머리가 보였다. 징그럽고 무서운 거머리는 대개 다른 사람이 먼저 찾아내는데, 아프거나 가렵지 않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손톱으로 눌러 떼어내기도 하고 담뱃불로 뜨겁게 지지면 스스로 빠져나왔다. 피 흐르는 종아리를 물에 씻은 후 손으로 한참 누르거나 목에 둘렀던 수건을 다리에 감아 지혈을 시켰다.
아버지는 호인으로 소문났지만 물꼬만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내 논부터 물대는 것을 당연시했다. 남에게 양보하면 우리 논에 물이 마르니 언제나 아음이 조급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에게 물꼬는 목숨줄이었을 게다. 빚을 내어 장만한 논마지기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줄 마지막 보루였다. 자연 이웃들과 다툼도 많았지만 그러나 과하게 물 욕심을 내진 않았다.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논에 물이 항상 가득하면 벼가 부실하다. 때론 물을 빼고 논바닥을 말려야 벼가 튼튼해진다. 어느 해, 이웃 어른은 논에 물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밤새 소나기가 퍼부어 논둑이 터져 땅이 패고 벼가 묻히거나 휩쓸려버렸다. 과욕이 화를 부른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물꼬였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 당신은 열 명이나 되는 대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누에를 쳐서 모은 돈과 더러는 빚을 안고 매년 논을 샀다. 그렇게 고생해서 논부자 소리를 들었지만 오빠들 살림 날 땐 미련 없이 땅을 내주었다. 평생 쓸 줄 모르고 모으기만 하던 당신도 자식들에겐 제때 물꼬를 틔워준 셈이다.
오랜만에 논을 둘러보았다. 무논엔 실지렁이와 우렁이가 꾸물거리며 논을 매고 있다. 하늘과 구름이 바람에 일렁인다. 둑에서 몸 말리던 개구리들이 첨벙첨벙 논으로 뛰어든다. 막냇동생과 물방개 잡으러 맨발로 논을 헤집던 기억이 떠오른다.
양말을 벗고 첨벙, 논으로 들어간다.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고운 진흙이 쑥쑥 올라오는 게 마냥 좋다. 드문드문 보이는 우렁이를 몇 마리 잡아 비닐봉지에 넣었다. 물꼬에 발을 담그자 물비늘이 반짝인다. 문득 돌아보니 어느새 곁에 온 아버지도 함께 말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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