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 노혜숙
해마다 해온 일이지만 고추장을 담그기는 그리 쉽지 않다. 담글 때마다 긴장이 된다. 간이 적당한가 싶으면 너무 달기도 하고, 단맛이 적당하다 싶으면 묽어서 속이 상하기도 한다. 감칠맛 나는 맛 좋은 고추장을 담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정성,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올해는 정말 맛있는 고추장을 담아 보겠다고 벼르며, 가을에 맏물 고추를 사고, 고추장 잘 담기로 소문난 분의 비법을 메모해 놓았다. 늘 사용하던 물엿 대신 이번에는 조청을 만들었다. 곱게 빻은 고춧가루에다 메줏가루를 좀 섞고 조청으로 농도를 조절하고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맞추었다.
신접살림을 났을 때였다. 옆방과 부엌을 같이 쓰도록 되어있는 셋방이었다. 옆방에는 양장점을 하는 내외와 딸 경아가 살고 있었다. 두 집에서 같은 부엌을 사용하는 게 불편하기도 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반찬을 만들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 새댁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나누어 먹는 재미도 괜찮았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밥 냄새가 싫어졌다. 방에 누워있는 것도 편치가 않았다. "새댁 어디 아프나?" 밖에서 경아 엄마가 불러도 대답조차 하기 싫었다. 헛구역질을 하는 내 모습을 본 경아엄마는, 고추장 한 보시기를 가지고 왔다.
"속이 느글거릴 때는 고추장이 최고더라."
정말 신기했다. 메스꺼울 때는 젓가락으로 고추장만 찍어 먹어도 속이 가라앉았다.
부엌에 나가는 일이 고민스러웠다. 자꾸만 내 눈이 경아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그 맛있는 고추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골에 사는 경아 할머니가 가져오는 곡식 보따리에는 매번 고추장이 있었다. 일 년 내내 고추장을 먹을 수 있는 경아 엄마가 눈부시게 부러웠다.
설 이 되었다. 별장 같기만 하던 집에 사람 사는 맛이 난다. 세 아들과 딸린 식구들을 합해 열 식구가 복작댄다. 어린 손녀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울다가 웃고, 뒹굴다가 일어나서 뛴다. 거기다가 할아버지 웃음소리까지 어우러져 집안 분위기는 온통 재롱잔치하는 날이다. 삼대가 한 집에 모일 수 있기는 명절이 아니고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할아버지는 손녀들 재롱에 더 젖고 싶지만, 명절 때의 귀경길은 더 멀다. 고생을 덜하려면 일찍 출발해야 한다. 오늘은 눈이 올 듯한 날씨여서 더욱 서둘러야 한다.
간장은 페트병에 담고 고추장은 유리병에 담았다. 고추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본다. 매운맛, 새콤한 맛, 달착지근한 맛이 잘 어우러져 곰삭았다. 지금까지 만든 고추장 중에서 제일 잘 만든 고추장이라 자부하면서 며느리들을 부른다. 며느리들을 부르는데 큰아들이 덩달아 따라왔다.
"울 엄마가 담은 고추장 맛 좀 보자."
손가락 끝으로 고추장을 찍어 올리던 큰아들이 멈칫거렸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아도 대답이 없다. 아들의 손가락 끝에는 붉은 머리카락이 달려 있었다. 나는 못된 짓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무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음식에 들어있는 머리카락이 눈에 안 보일 때까지 고추장 담아주는 눈치 없는 시어머니는 되지 말라고 하던데 이젠 그만 둘 때가 됐는갑다. 너그줄라고 담아 둔 고추장에도 머리카락이 들어 있으면 우짜노."
큰며느리가 얼른 말을 받았다.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 실수는 젊은 저도 하는데요, 뭘. 혹시 우리 고추장 담아주기 싫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요. 다음에 또 담아 주시는 거지요?" 며느리는 다짐까지 받아 가며 나보다 더 수다를 피웠다.
온종일 귀가 운다. 오른쪽 귀가 운다. "혹시 우리 고추장 담아주기 싫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요?" 왼쪽 귀가 운다. "음식에 들어간 머리카락이 눈에 안 보일 때에도 고추장 담아주는 눈치 없는 시어머니는 되지 마라." 붉은 머리카락이 달랑달랑, 아직은 고추장을 담아줄 수 있다는 내 자신감이 오늘은 몸살을 앓고 있다.
텅 빈 하늘, 서산 허리에 해가 걸렸다. 저녁노을이 고추장 빛깔만큼이나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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