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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겨울 나그네 / 김진식

겨울 나그네 / 김진식

 

 

겨울 나그네는 가장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행복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겨울을 맞으면 무엇인가 가슴을 짓누르는 어둡고 무거운 찌꺼기를 훌훌 벗어버리고, 겨울 산천을 대하면서 깊고 풍부한 마음의 행복을 맛보며, 무엇인가 따라붙는 어두운 겨울 그림자를 털어버리고 아무 곳이고 떠도는 겨울나그네를 그려보게 된다. 실은 그렇게 겨울나그네가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겨울나그네의 몸짓으로 겨울 열차를 타보고 싶은 것이다.

산천의 어디에든지 떠 다녀보며 무엇인가 확인해 보려는 삶의 의도가 깃들어 있기도 하다. 어느 작은 마을의 여인숙이든지 산간의 절간 같은 곳에서 겨울의 풍정에 젖어들면서 펼쳐지고 있는 앙상하고 삭막한 모습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바라보며 그 뜻을 새겨보고 싶은 것이다.

흰눈이 산천을 덮고 밤바람 소리가 겨울밤을 달리며 위세를 부리고 있을 때 순환처럼 와 닿는 자연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다시 자연과 만나는 일이다. 삶의 온갖 모습이 겨울의 강에 길게 누워 두꺼운 얼음 아래로 깊게깊게 흐르는 조용한 강물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겨울나그네의 아픔으로 빚는 따뜻한 사랑의 체험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잠기며 겨울을 맞이하기를 좋아하며 산천의 어디든지 찾으면서 겨울 떠돌이의 맛을 만끽하고 싶어진다.

굳이 겨울나그네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겨울만큼 조용한 가라앉음으로 추위와 적요와 어두움의 골짜기를 이루며 시련과 멈춤과 죽음의 뜻이 무엇인가를 절실한 아픔으로 만날 수 있는 계절도 없다. 그래서 겨울나그네가 떠도는 산천에는 관조가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 아무 데도 갈 곳을 정하지 않고 까닭도 없이 겨울의 깊은 골짜기를 향하여 내달으며 그 골짜기의 차가운 어두움의 두꺼운 벽 아래로 다시 생명의 불씨로 숨 쉬고 있는 것을 갈망하며 찾아보는 것은 겨울나그네의 가슴 깊은 곳으로 뜨거움을 품고 있기 때문인가. 그리하여 잠자는 겨울의 산천을 찾으며 펼쳐진 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차라리 따뜻하고 은밀한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그 쓸쓸한 폐허의 삭막함으로 잠자는 차가운 어두움 속을 겨울의 대지는 단지 멈추어 쉬고 있을 뿐임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주검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은 곳에서 묻어나는 따스한 입김으로 깊은 가슴에 와 닿아 그 뜨거움으로 사랑의 불을 지피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겨울을 떠도는 나그네의 쓸쓸한 헤매임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나는 뜨거운 사랑 때문에 그 숨결의 은밀함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죽음과 절망의 미화나 노래가 아니라 잠자는 대지의 간절한 기도를 듣는 것이며 그것으로 얼마나 뜨겁고 촘촘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를 찾아도 붐비지 않고 얼음길과 찬바람과 더불어 만나고 맞이하기 때문에 훨씬 그 아픔이 절실하고 간절하여 부끄럽지 않다. 그리하여 겨울이 깊을수록 더욱 깊은 뿌리를 가꾸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을 가꾼다. 비록 남루한 행색으로 떠돌더라도 그 옷깃으로 때를 익히며 언 강의 바닥 깊숙이 숨쉬는 생명으로 뜨거움을 나눈다. 어느 곳을 찾는지 예고하지 않고 마중을 바라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느끼고 사랑하면 된다.

그래서 겨울나그네는 가난으로 오히려 풍족함을 즐기고 고된 역경으로 희망을 품으며 행복한 떠돌이를 즐긴다. 꽁꽁 얼어붙은 산천의 깊은 곳에 묻혀진 광맥을 캐는 부지런한 땀방울로 사랑을 깨달으며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되살리는 그리움으로 깊이를 맑게 하며 아픔과 시련의 더미더미를 넘어가면서 뜨거운 불씨를 품고 잠자는 여인의 부드러운 가슴에 귀기울이며 기다리는 바람으로 겨울나그네가 되고 싶다. 어쩌면 행려병자가 되어 조용히 잠자는 산천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돌아오지 않는 강처럼 흐르는 찬바람 아래로 조용히 숨죽여 품고 있는 그 간절한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사랑하며 맞이하는 몸짓으로 겨울나그네의 객기에 젖어들고 싶다.

차가운 바람이 가지를 울리며 지나가고 영하의 기온이 독을 깨고 묘목을 얼어죽게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나운 사신의 칼날이 제철에 떨치더라도 겨울나그네는 희망을 바라볼 줄 알고 묻혀진 사랑의 숨결을 들을 줄 알기 때문에 겨울의 풍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겨울나그네는 옷깃을 여미며 흐느끼는 낮고 작은 목소리로 따뜻한 눈물처럼 돌아가는 길목에서 온갖 기억들과 만나는 것이 반갑다. 무엇인가 찾으며 듣는 그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의 눈빛이 반짝이고 끝없는 순례자의 간절한 마음으로 그 어두움 속 깊숙이 살아 있는 빛을 바라보며 그 적막의 깊은 골짜기로부터 겨우 반짝이는 생명의 빛깔을 감지하며 빈 하늘의 초록빛 꿈을 숨쉬는 바람을 만나보는 것을 사랑하며 겨울나그네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어느 날 문득 흰눈이 펄펄 휘날리는 아침, 어디인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산천을 생각하며 겨울나그네가 되어 떠나고 싶다. 증기기관차의 목쉰 기적에 실려 산이거나 강이거나 바다이거나 들판이거나 겨울의 산천을 만나며, 겨울의 아픔과 절망을 바라보며, 겨울의 사랑과 희망을 찾아보고 싶다. 그 차가운 가슴속으로 어두움을 헤치고 꺼지지 않는 숨결을 들으며 행복한 겨울나그네가 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