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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탕자의 귀환 / 서정길

탕자의 귀환 / 서정길

 

 

녀석이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불쑥 나타났다. 주저함도 없이 큰 소리로 “어이 정 친구 잘 있냐."라며 인사한다. 부리부리한 눈매며 타고난 피부는 윤기가 흘렀다. 타준 커피를 마시더니 한 잔 더 달라고 한다. 상사의 눈치가 보여 어쩔 줄 모르는 나와는 달리 태연하다. 등줄기에 진땀이 흐른다. 밖으로 나가자는 말에 “야, 사무실 분위기 좋네. 예쁜 아가씨도 많고...” 뒤통수를 후려치는 이 한마디에 귓불이 후끈 달아오른다. 오장육부를 확 뒤집는다.

그는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 때까지 같은 반에서 지낸 사이다. 딸부자 집 3대 독자로 호랑이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책보자기를 들고 다니는 나와는 달리 가방을 메고 다녔다. 비가 오는 날에는 누나의 등에 업혀 등교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황소고집이지만 큰 눈만큼 겁도 많았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 청소를 끝낸 둘은 늦게 집으로 향했다. 소나무 숲길을 지날 무렵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 소리에 놀라 엉엉 울던 녀석은 불어난 도랑물을 건너다 넘어져 허우적댔다. 뒤따르던 내가 간신히 일으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할머니는 삶은 옥수수를 내놓으며 친하게 지내라고 신신당부했다. 둘은 막역한 사이가 되었고 나를 정 친구라 불렀다. 마분지. 색종이, 크레파스까지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서슴없이 내주었다.

친구는 공수부대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휴가 때면 베레모와 날을 세운 바지로 한껏 멋을 부렸다. 보병 출신인 나와는 격이 달라 보였다. 그러던 그는 제대 후에는 행적을 감추었다. 거주지도 직장도 알 수 없었다. 친구 모임에도 가물에 콩 나듯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결혼 청첩장을 내 앞에 내밀었을 때 그의 변신에 또 한 번 놀랐다. 티 잡을 때라곤 없는 배우 같은 모습이었다, 결혼식은 현역 후배들이 검으로 행진 터널을 연출하는 가운데 축포가 터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행되었다. 난생처음 본 결혼식은 한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녀석이 사무실에 나타났을 때 나는 첫아이를 둔 말단 공무원이었고 녀석은 두 번째 결혼을 한 상태였다. 역한 술 냄새를 풍기며 느닷없이 친구들이 모아 둔 곗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곗돈도 공금이라며 거절하자 녀석은 채권자로 돌변했다. 친구 간에 그 정도 편리도 못 봐주냐고 윽박질렀다.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빌려달라는 50만 원은 당시 내 봉급의 몇 곱절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회장은 남도 도와주는데 친구 살리는 셈 치고 20만 원이라도 빌려주자고 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얼마나 절박했으면 내게 와서 이러하겠나 싶었다. 돈을 낚아채듯 받아 쥐고는 한 달 후에 보자며 의기양양하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약속일이 되었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다이얼을 돌렸지만, 아예 받지 않았다.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돈은 고사하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이런 양아치 같은 놈을 친구라고 여기다니 억장이 무너졌다. 결국 모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어낸 돈보다 배신감에 한동안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녀석이 세 번째 결혼했다는 풍문이 돈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윤기나는 피부는 온데간데없었다. 눈가에 푹 팬 주름이 그동안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한 친구가 곗돈 문제를 들먹이자 천연덕스럽게 형편이 좋아지면 갚겠다고 능청을 떨었다. 친구를 속이는 네놈이 나쁘다는 질책에도 “내 처지가 되면 너거들도 똑같다”며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늘어놓았다. 녀석의 뻔뻔한 태도에 따귀라도 한 대 갈겨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일어서려는데 눈치챈 아내가 소매를 붙잡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천정에는 녀석이 히죽거리는 모습이 맴돌았다. 지난날의 일들이 하나둘 스쳐 간다. 몸이 불편한 엿장수의 눈을 속여 엿을 훔쳐 먹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성당에 다니면서 나쁜 짓을 하면 되냐고. 아마 그때는 천사 같은 아이였을 것이다. 그런 친구를 이토록 단단하게 옭아매고 있는 뻔한 거짓말, 잘난 체하는 위선과 우김질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녀석은 아버지의 유산을 몰래 정리하고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났다. 10여 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 녀석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갈 무렵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던 아침 초로의 노인이 나를 불렀다. 자세히 보니 녀석이었다. 행색은 남루했으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큰 눈에는 어릴 적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정 친구야! 너한테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내가 쪼맨할 때부터 지금까지 빚 많이 진 거 알고 있다. 요즘도 니한테 빚진 거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이건 참말이다.” 녀석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종심從心이 다 되어갈 무렵에야 철이 난 걸까. 큰 눈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