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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또 하나의 고도 / 양달막

또 하나의 고도 / 양달막

 

 

아직도 여자는 앞집의 대문을 두드린다. 앞집에 세 들어 살았던, 여자의 언니가 죽은 지도 꽤 되었다. 열리지 않는 대문을 두드리는 그녀는 몸을 바로 가누기조차 힘든 중증 장애인에다 정신도 온전하지 못하다.

꼽추였던 그녀의 언니는 생전에 동네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했다. 식당 문을 열 시간이 아닌데도 셔터를 두드리며 언니를 부르는 동생을 위해 귀찮은 내색도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식탁 앞에 동생을 앉혀놓고 음식을 먹인 뒤 식당을 나갈 때는 쌀도 건네줬다. 동생은 그 쌀을 들고 집으로 가면서 남의 집 대문 앞 계단이나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었다 가곤 했다.

언젠가 그 식당의 셔터가 계속 내려 있기에 옆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꼽추 여자가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몇 달 뒤 그 음식점은 다른 사람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몇 번 언니를 찾아간 여자는 주인에게 욕설과 함께 쫓겨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여자는 언니의 살림집인 앞집 대문 앞에 가끔 나타났다.

“언니! 문 좀 열어줘!”

언니를 부르다가 대답이 없으면 땅바닥에 앉아 설움을 풀었다. 울음 섞인 목소리 속에서 그녀의 가족사를 대강 알 수 있었다. 남편 없이 살았던 꼽추 언니,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어버린 오빠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빠를 들먹일 때면 여자는 통곡을 했다. 한 가닥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망가진 가족사였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여자를 본 어르신들은 곧 비가 오겠다는 말을 했다.

여자가 처음부터 중증 장애인은 아니었다. 약 이십 년 전 그녀는 동네 골목길 한 쪽 포장마차에서 호떡을 구워 팔았고, 연탄 화덕을 놓고 뽑기 장사도 했다. 그러다가 여자에 대해서는 잊었다. 여자가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여자가 보였지만 예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가누지 못한 머리로 인해 시선을 바로 하지 못했고 온몸을 비틀면서 힘겹고 위태롭게 걸었다. 얼굴도 너무 늙어버렸고 앞니 몇 개도 빠진 상태였다. 여자 옆에는 그림자 같은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내 쪽으로 나갈 때면 우리 집 앞을 지나갔다. 여자는 악을 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때로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동네 개들이 짖었다.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여자는 우리 대문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가 지날 때마다 불만을 나타냈다.

“저런 여자를 나라에서 어떻게 좀 해야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시끄러워서 어디 살겠어요?”

“나라에서 보호를 해주려고 해도 남편이 멀쩡하게 살아 있어서 안 된대요.”

“남편이 그렇게 못 됐대요. 처음에 여자도 멀쩡했는데 남편에게 많이 맞아서 저렇게 된 거래요. 그래도 아들은 착하더라고요.”

여자의 행동은 못마땅하지만 아들만은 효자라고 칭찬을 했다. 아들 때문에 여자는 면죄부를 받는 듯했다.

그 아들을 나도 여러 번 보았다. 잘 생긴 얼굴에 여드름이 송송 돋은 고등학생이었다. 또 다른 앞집은 대문으로 오르는 계단이 두 개 있다. 모자(母子)는 그곳에서 자주 쉬어갔다. 오래 걸으면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한 아들의 배려였다. 마주 앉아 연인처럼 소곤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더울 때면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기도 했다. 때로는 우는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곤 했다.

“엄마! 내가 숨을 테니까 찾아보세요.”

아들은 이런 말을 하며 어느 집 대문에 몸이 다 보이게 숨는 척했다. 여자는 아들과 있을 때면 난폭하지 않았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한 시선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그 학생은 내게 주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그 학생에게서 알았다. 6,7년의 그 아들은 지금 많이 변했다. 더 이상 엄마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온 시내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구시렁거렸고, 보물을 찾듯 거기의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 청년이 엄마인 여자를 자꾸만 닮아가는 게 안타까웠다. 본 적이 없는 학생의 아버지에게 원망이 뻗쳤다.

“아줌마! 왜 이런 걸 얻어 가는 거예요?”

언젠가 그날도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비닐에 담아 들고 가는 여자에게 물어봤다. 그날은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여자는 집에 가서 요리를 해먹는다고 했다. 얻어오지 않으면 남편에게 혼난다고 하면서 욕설과 함께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베케트'의 희곡 속에서 두 남자는 계속 고도를 기다린다.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 황량한 길가에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린다. 그가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에서다. 해가 넘어가고 다음 날이 밝아도 고도는 오지 않지만 그들은 또 기다린다. 어떤 이는 고도가 내일 올 거라는 말을 해주고 간다. 고도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기다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안다. 이 두 남자처럼, 여자 역시 오지 않을 언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돌아오지 않을 줄 알면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희망처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가 두드리는 대문은 열릴 때만 대문이다. 열리지 않으면 벽이나 다름없다.

‘아줌마가 아무리 두드려도 당신 언니는 문을 안 열어준다고요. 아니, 열어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하세요.’

여자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철제 대문의 시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 언니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아직까지 갖고 있다면 단념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 언니에 대한 기다림마저 놓아버린다면 여자의 삶이 너무 허망할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