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바라기 / 조현미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깬다. 때맞춰 승강기 문이 열리더니 갓 활자화된 어제가 현관 앞에 배달된다. 먹다 만 옥수수처럼 듬성듬성 불빛을 단 아파트 꼭대기, 별 하나 걸려 있다. 제일 먼저 해를 마중하고 잠자리에 든 뒤에야 뜨는, 태양의 일곱 자식 중 가장 효자인 샛별이다. 별나라 시민을 꿈꾸던 유년의 저녁, 그는 개밥바라기라는 이름으로 내게 온 생애 최초의 별이었다.
신문을 펼치자 사절지 가득 촛불이 일렁인다. 노란 행렬이 광화문광장을 벗어나 종로 쪽으로 번지고 있다. 수십만 마리의 나비 떼가 날아오른다. 여윈잠의 여운이 순식간에 달아난다. 활자 하나하나가 별처럼 깜빡이더니 우수수 밤하늘이 쏟아다.
오후 여섯 시가 채 안 된 시간. 광장은 열기로 뜨거웠다. 솜 바닥에서 점등된 온기가 이내 온몸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옮겨붙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둥둥 북이 울고 목젖이 사뭇 뜨거워졌다. 지팡이에 의탁한 어르신부터 엄마 품에 안긴 아기까지, 별은 밤하늘에만 뜨는 게 아니었다. 종이컵 속에도, LED 등에도 스마트폰에도, 사람들 마음에도 하늘의 파수꾼은 숨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 딸애와 나란히 앉아 별을 보았다. 한밤의 공원은 꽤 쌀쌀했지만 마음속 열기는 채 식지 않았다. 친절한 스마트폰 앱이 이내 겨울 하늘에 찬란한 별자리를 그려주었다. 한참 밤하늘을 뒤적거리던 아이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엄마, 별은 말이야, 보이지 않을 때 더 반짝이는 게 아닐까? 희망이란 게 눈에 훤히 보이면 절망할 사람이 어딨겠어? 그래서 신들은 별을 밤하늘에 꽁꽁 숨겨둔 건지도 몰라."
삼십구 년 전 지구를 떠난 보이저 1호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가 해왕성을 지나며 선물한 '창백하고 푸른' 지구의 민낯과, 우주선에 탑재된 골든 레코드, 약 사만 년 후에 도착한다는 기린자리의 항성 'AC+79 3888'과 머잖아 우주의 미아가 될 보이저 1호의 운명과 행성 간 거리보다 백만 배는 멀다는 별들의 간격에 대해, 뭇별과 은하와 우주인과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대해, 그 모든 것들이 우주의 5%밖에 안 된다는 놀라운 사실에 대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까무룩 졸고 있는 별들을 헤집고 상고머리 계집애가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소쿠리 가득 별을 따겠다던, 볼이 온달처럼 통통한 아이였다.
아이는 별이 좋았다. 제일 먼저 밤하늘에 불을 댕기는 개밥바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충직한 별들은 아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별이 흐드러진 밤하늘은 달밤 메밀꽃밭처럼 환해서 들짐승이 종종 나타난다는 고개도 그리 무섭지만은 않았다. 엄마의 젖이 보름달처럼 부풀 때, 젖먹이 막냇동생을 업고 고개 너머까지 동행해 준 친구도 별뿐이었다. 아이에게 별은, 어둠에 거주하는 것들 중 가장 친절한 존재였다.
수천억 개의 싸라기별이 흐르는 우주 강 미리내, 하늘의 황제가 산다는 북극성,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는 북두칠성과 삼신할미별 남두육성, 일곱 개의 배고픈 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좀생이별, 커다란 재앙을 가져온다는 살별과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별똥별…. 라디오며 티브이 전파가 삼십 광년까지 퍼져 나갈 때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별을 믿었다. 촘촘한 별들이 다림질한 듯 말간 아침을 데리고 왔다. 달과 좀생이별의 거리가 가까우면 풍년이었고, 먼 해엔 아이들의 밥그릇이 유독 홀쭉했다. 칠성판에 누운 망자가 북두칠성으로 향하는 새 몽고반점을 단 아이들이 태어났으며 젊은 남녀는 열렬히 사랑하다 헤어지곤 했다.
아이는 북극성 언저리의 별을 사랑했다. 그곳의 별들은 때로 흐린 낮보다 환했고 지평선 아래로 이우는 법이 없었다. 비상하는 용의 품에 안겨 새끼 곰이 잠자고 어미 곰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렸다. 금실 좋은 카시오페이아와 케페우스 부부가 사철 내내 북쪽 하늘을 따뜻하게 밝혀 주었다. 일곱 개의 국자별 어디쯤, 사랑하던 사람들이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거라고 아이는 믿었다.
하늘에 거주하는 건 신뿐이 아니었다. 사자와 전갈, 물병이며 하프까지 제우스는 하늘의 별로 올려주었고, 동방의 수호신 청룡은 자칫 호랑이 먹이가 될 남매를 위해 동아줄 별을 내려주었다. 별이 별을 낳듯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밤하늘을 점자판처럼 더듬다 보면 날이 희번해지기 일쑤였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소우주도 조금씩 확대되었다. 마치 원시별이 조금씩 진화해 주계열성이 되듯, 그렇게.
"엄마, 왜 북극성 주변의 별들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지 않나요?"
아이의 아이가 물었다. 아이에서 여자로, 아내이자 엄마가 되는 새 멀어진 별들이 아이 눈에 무량수로 찰랑거렸다. 오래전, 엄마의 눈에 뜬 유년의 제 눈동자를 아이 눈에서 종종 만나는 그녀였다. 아일 위해서라도 그녀는 다시 별지기가 되어야 했다.
모녀가 나란히 별바라기를 하노라면 별들을 다닥다닥 달고 고향의 밤하늘이 한달음에 와주었다. 한낮의 눈동자 같은 낮별이 '낮엔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하늘의 파수꾼들이 숨어 있다.'던 에우리피데스의 노래를 읊조리기도 했다. 별똥별이 하늘에 빗금을 긋는, 찰나를 기다리며 밤을 하얗게 새우는 날도 많았다.
장대를 휘저으면 우수수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실은 수광시에서 수광년, 심지어 수억 광년을 달려왔다는 것을 이제 아이는 안다. 신생아별이 눈뜰 때 늙은 별은 죽는다는 것을, 별의 죽음이 새 별을 잉태한다는 것을,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별을 보며 농사를 점치고, 운명을 읽고, 길가메시의 서사시를 써나가리란 것을….
딸애의 잠은 여전히 억겁 우주의 시간을 배회 중이다. 삼십 분의 아침잠이 열여덟, 딸애 생의 골든타임이 될지도 모른다. 가만, 이불깃을 끌어올린 후 방문을 닫아준다.
어쩌면 별이 끄덕끄덕 조는 이곳의 새벽은 저 별나라의 저녁인지도 모른다. 먼 별밭에도 마을이 있고 아이가 있어 지금 여기, 반짝거리는 저 별은 빛의 속력으로 달려온 누군가의 눈빛인지도. 먼 훗날 딸애가 아이를 낳고, 그 아기가 또 아이를…. 십억 년쯤 지나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의 목소리가 재생되리라는 것을, 그때 사람들은 조금 더 착해지고 너그러워지리란 것을 믿·는·다.
동쪽 하늘에 조금씩 여명이 번진다. 어쩌면 별이 되어 온 걸까? 밤새도록 제 방 창가를 서성거렸을 어린 영혼 하나, 시나브로 멀어진다. 광장을 적시던 노랫소리가 귓전에 흥건하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가슴에 아이를 묻은, 어머니들 젖은 눈 위로 삼백네 개의 별이 아프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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