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풍(家風) / 김우현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듯이 가정마다 가풍도 다르다. 조용한 집안, 활기찬 집안, 훈훈한 집안, 잇속을 심히 따지는 집안, 인심 좋은 집안, 콧대 높은 집안, 서민적인 집안 등 그 유형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가풍이란, 한 집안 구성원들의 공유의 생활관이 알게 모르게 표출된 그 집안 특유의 생활양식이다. 그러니 어떠한 가풍 속에서 자라났으며, 어떠한 가풍 속에서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가풍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이에서 비롯되었다.
물질문명보다는 정신문화를 귀히 알던 시대의 사람들은 가풍을 매우 중시했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것을 예사로 아는 경향이 많다. 예사로 알든 말든, 가정이라는 단위가 사회 속에 존속하는 한 가풍은 형성되기 마련이고, 그 결과가 가정 밖으로 파급되니, 그게 문제다. 나도 오십이 되면서부터 꽤 진지하게, 내 집 가풍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간혹 해 보게 된다.
팔자걸음으로 의젓함을 뽐내는 식솔食率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우리 내외가 어울려서 테니스를 할 정도이니 아주 고풍스러운 집안이라고는 할 수 없겠고, 아직도 높임말과 예삿말이 아무 저항 없이 잘 구분되어 쓰이고, 아이들은 어버이의 훈계를 제법 다소곳한 태도로 받아들이니 퍽 현대적인 집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심히 화가 났을 때에는 그렇지도 않지만, 평상시에는 우리 내외가 서로 존대하고 있으니 ‘자기’, ‘나’식의 짭짤한 재미가 넘치는 집안이 아닌 것은 확실하고, 올봄에 대학에 들어간 막내인, 하나뿐인 딸과는 엉덩이 치기를 해서 줄 밖으로 밀어내는 게임을 할 정도이니 썩 기품이 높은 집안도 아니다. 2남 1녀가 서로 싸움질하거나, 우리 내외가 으르렁거리는 일이 별로 없으니 투사형의 가풍도 아니고, 온 집안 식구가 조용히 책 읽는 광경도 흔하지 않으니 선비형의 가풍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줄 돈 받을 돈하며 아옹다옹하는 일 없으니 상혼이 왕성한 집안이라도 할 수 없고, 남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식솔도 없으니 자선적이거나 봉사적인 집안이랄 수도 없다. 아비가 높은 관원이 아니라서 남 앞에서 으쓱거릴 일이 없고, 아이들 또한 꼬마 탤런트 노릇도, 신문지상에 얼굴이 나올 만한 기특한 일도 한 적 없으니 우쭐거릴 건더기가 없다.
싫은 일을 당하면 언짢아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좋아하고 잘한 일은 칭찬하고 잘 못한 일은 꾸짖고 하는 범상인으로서 다반사가 꾸역꾸역 펼쳐지는 속에서 나와 나의 식솔들은 살아가고 있다. 끼니때마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아주 유식하거나 고상한 말은 별로 없고, 그저 보고 듣고 느끼고 한 일들이 대체로 화제의 주종을 이룬다.
본래부터 4대 정승의 후예도, 천노賤奴의 자손도 아닌 터라 평범할 수밖에 없겠으나,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특색 없는 그 점이 바로 우리 집 가풍의 특색인 것만 같다. 철저하게 평범한 것은 역시 특색이거나 특징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 권속들은 남을 함부로 우러르지도, 함부로 깔보지도 않는 묘한 기질들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런 점들을 시정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자신들만큼의 인간의 값어치는 다른 누구라도 다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며 살아 주기를 바란다.
가풍은 저절로 형성되기는 하겠지만, 노력하면 한 만큼 좋은 것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이란 교육을 뜻한다. 교육성과는 교육받는 쪽에 대한 강요만으로는 잘 이룩되지 않는다. 교육하는 쪽의 자제自制와 자계自戒, 자기 계발이 더욱 요청된다.
나는 특징 없는 우리 집 가풍에다 무엇인가 하나를 첨가 시키고 싶다. 명랑이 가풍이어도 좋고, 근검이 가풍이 되어도 좋고, 끈기가 가풍이 되어도 좋지만, 그것들보다 더 요긴한 것이 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는 가훈이 바닥에 깔린 가풍이 그것이다. 이것이 우리 집안의 가풍이 되기를 바라고, 또 모든 가정의 가풍의 근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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