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으로 되었다 / 곽경옥
휴대폰을 확인하다 문자메시지 하나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설 명절 대통령 선물 받으실 분’으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다. 뜬금이 없다. 대통령이 나를 어떻게 알고 이런 일을 하시겠는가! 이젠 스팸 문자가 이렇게도 오는구나. 몇 달 전에 ‘요즘 세상에 보이스 피싱하는 놈들은 정말 날도둑놈들이다. 남의 개인정보를 빼갔으면 데이터 분석이라도 해야지. 너무 날로 먹으려고 한다’며 직장 선배가 흥분한 적이 있었다. 그 선배는 60세를 코앞에 둔 억울한 미혼인데 ‘엄마 나 폰이 고장 나서’라는 문자가 왔다며 기분 나빠했다.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혹시 그 소리가 새어나간 건 아니겠지!
다음날 동료들과 설 명절 보너스 이야기를 하다가 대통령 선물 문자가 생각났다. “이야! 요즘 보이스피싱이 진화하고 있더라. 이제는 청와대까지 건드린다. 대통령 설 선물이라니 너무 웃기지 않니?”라며 말을 내던졌다. ‘청와대 사칭 투기 사건은 진부한데 대통령 설 선물은 신선한데요.' 하며 사람들이 같이 웃었다. 행정처에서 근무하는 팀장 한 명이 '어 그거 진짜입니다. 보이스피싱 아닙니다. 청와대에서 코로나 때문에 고생한 의료인들 추천해달고 공문이 왔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선생님이 추천되었는데 선정된 분들은 문자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어? 뭐라고? 왜에?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휙 지나갔다. 엄마가 몰래주던 사탕을 동생들에게 들켜버린 것 같이 그 말을 들은 동료들에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치고 코로나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맘 놓고 기뻐할 수도 없는 판이다. 며칠 뒤엔 우체국에서 문자 한 통이 왔다. 택배 받을 주소지를 묻는 문자가 갈 테니 꼭 확인해달라는 내용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다른 사람들 역시 스팸문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기는 있었나 보다.
구정을 며칠 앞둔 날 청와대 봉황 문양이 새겨진 택배가 문 앞에서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이 난리가 났다. 거의 한 시간 동안 뜯어보지도 못하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세워보고 눕혀보고 폰으로 찍어 확대도 해봤다. 남편은 ‘이런 건 대를 이어서 봐야 하는 거니까 박스째로 박제를 해 놓자’고도 했다. 나도 sns에 올려 자랑질 좀 할 작정으로 인증이 각을 맞추느라 또 선물 박스를 몇 바퀴 굴렸다. 뭐가 들어있을까? 차마 이 귀한 걸 뜯어볼 수가 없다. 시원한 곳에 보관하라는 걸로 봐서 먹는 게 들어있나 보다. 굴러다니는 소리가 나는 데 이건 또 뭐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손 빠른 딸이 얼른 휴대폰으로 ‘청와대 선물’을 검색해 본다.
아뿔싸! 중고거래 사이트 '당근마켓'에서 청와대 선물이 22만 원~25만 원 등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아니 이 귀한 걸 내다 팔다니! 그냥 선물도 아니고 청와대에서 보내준 선물인데! 내게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어떤 가치가 담겨있는 것인데 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의 나의 수고가 덤으로 팔리는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 청와대 선물'이란 키워드에 딸려오는 글 하나가 눈에 뜨였다. 일본 대사는 포장지가 독도 사진이어서 반송시켰다는 글이다. 내 눈에는 애국가에 나오는 일출 사진인데 그의 눈에는 독도만 보였나 보다. 포장지도 포장지이지만 반송시켰다는 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청와대의 반응은 무반응이다. 무반응이 반응이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의미는 서로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주는 사람의 손을 떠나 받는 사람의 손에 들어갈 때 마음이란 게 따라오는 것 같다. 선물이란 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같다. 선물은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내게 온 선물은 ‘인정’이라는 게 따라온 것 같았다. 그동안 나의 수고를 직장에서 인정해 주었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포장을 뜯어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내일 출근할 때 병원 대표로 받은 거니까 인사도 드리고 대통령님께도 편지 한통 보내드려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지난 12월이었나? 대통령님께서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신 적이 있었다. 코로나의 중심에서 의사들은 장기간 파업을 했고 그 공백까지 메우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간호사들을 격려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에 엄청 시끄러웠다. 대통령의 그 말은 대통령이기 때문에 격려가 아니라 의사 간호사 편가르기라고 했다. sns에서는 비난 댓글이 폭주했다. 코로나 환자들이 격리된 병실에서 간호사들이 24시간 동안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을 하는지 그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정작 편을 갈라놓은 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들인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전쟁 대신 평화를 이루려면 핵 무기 말고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다. 근데 말 한마디 때문에 핵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어제는 간호사를 코로나 영웅! 코로나 천사!라고 하며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밀어 넣더니 이제 그들은 정치놀이판에서 놀이도구로 써먹고 있었다. 당분간 뉴스를 끊어야겠다.
자랑질을 좀 더 길게 즐기기로 했다. 직장에서는 동료들에게 좀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아 있고 까딱 잘못했다가는 경쟁자들에게 욕먹을 판이라 번외 자랑질을 즐기기로 했다. 자랑은 사람이 많아야 제맛이지!. 우리 식구들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 설 명절을 기다렸다. 하필 울진 시댁에는 팔 남매가 동서남북에서 다 모이니 위험할 것 같다며 다음으로 미루자고 연락이 왔다. 그렇다면 내게는 친정이 있지. 엄마 아버지는 언제나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반겨주신다. 다 모이면 열대여섯 명 정도가 될 것이다. 그때가 디데이다. 그동안 베란다 그늘진 곳에 고이 모셔놓았다. 오며 보고 가면서 또 보고 볼 때마다 인삼 한 뿌리씩 먹은 것 같이 심박수가 뛰었다.
드디어 설이 되어 어깨를 쫘악 펴고 친정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가족 단체 카톡 방에 예고편을 보내 놓은 뒤라 가자마자 선물 해체식부터 경건하게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런 걸 언박싱이라고 하며 개봉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놔야 된다고 했다. 나도 이 정도의 호들갑을 떨어야 청와대 선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되었다. 마치 흥부네가 박을 타는 것 마냥 기대와 흥분이 생중계되었다. 모두 지방 특산품 구성 세트인데 비싸 보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박스에 딱 누워있는 모습이 품위가 있어 보였다. 그 지역에서 나오는 최고의 특산품이어서 그런지 농부의 한 땀 한 땀 정성까지도 느껴졌다. 내가 존중받은 느낌이다. 가족들의 부러움은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음 이 맛이지!
아이들 틈에 앉아계시던 아버지께서 대박을 터트리셨다 “이 귀한 걸 우리 홍 서방이 받았구나!” 하시며 당겨 앉으셨다. 으악 아버지! 큰일 날 뻔했다. 모두가 웃었다. 홍 서방 얼굴이 벌게졌다. ‘장인어른! 제가 아니고 지수 엄마가 받은 겁니다.’ 하였다. 엄마가 얼른 아버지 귀 옆에다 대고 ‘아이고 이 양반아 사위가 아니라 당신 딸이 받은 거라고 안 합니까?’ 하며 그 선물을 아버지 앞으로 당겨놓으셨다. 하긴 이 정도의 급이면 교장선생님 정도 되어야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어허 그래!’ 잠시 민망해하시면서 찬찬히 하나하나 꺼내보시고 또 대통령 편지도 읽어 보시던 아버지께서 혼자 말처럼 나지막하게 “음~ 우리 딸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이런 걸 다 받아왔겠노~” 하셨다. 그 말씀을 아버지 등 뒤에서 내가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족들도 얼음이 되었다. 갑자기 내 목이 뻣뻣해왔다. 감추어져 있던 나의 생채기들이 확 올라왔다. 가족들한테는 들키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는데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아 우리 아버지가 알아버렸다. 그 선물이 나의 피땀이라는걸!. 아 아버지! 역시 우리 아버지구나~. 세상사람 다 몰라도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청와대 선물보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더 좋았다, 이제 내가 우리 아버지께 괜찮다고 말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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