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탑 / 김아가다
내 몸이 붉어진다. 마을 입구에 있는 돌탑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이끼는 세월의 더께일까. 청태로 뒤덮인 옛 성벽처럼 느티나무를 병풍삼아 앉아 있는 탑의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돌탑은 지름이 5m, 높이가 3m인 둥근 원형이다. 모나고 뾰족한, 수많은 돌을 괴어서 만든 탑은 움푹하게 가운데를 중심으로 둥글게 쌓여있다. 그 복판에 디딜방아 절구공이 같은 길쭉한 돌이 꽂혀 있다. 마을 입구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나 커다란 바위를 수호신으로 모신 것을 본 적이 있으나 음과 양의 궁합을 인위적으로 만든 돌탑은 처음 보았다.
그 돌탑을 만나면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민망하다. 쳐다보면 누가 흉이라도 볼까 봐 마른침을 삼키면서 잰걸음을 걸어야 한다. 필경 곡진한 사연이 돌탑에 숨어 있으리라. 마을에 사는 바깥노인들한테 물어보려니 요망한 여편네라 생각할까 조심스럽고 안노인들한테 물어보려니 입방아 대상이 될까 염려스럽다.
마침내 용기를 냈다. 몇 해 전에 귀촌했다는 여인의 집을 찾아가서 돌탑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사한 지 삼 년이 되었지만, 그냥 돌무더기로 보았고 한 번도 궁금해 본 적이 없다고 웃었다. 이왕 소문날 바에야 알아내고 말리라. 내친김에 부탁을 했더니 최고령자인 마을 회장 집으로 안내했다. 초저녁임에도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노인이 여인들의 방문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돌탑은 동제를 모시는 곳이라고 했다. 현세와 내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어딘가에 기댈 곳이 사람들에게 필요했었나 보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밑에서 동제를 지냈다. 별 효험이 없자 돌을 쌓아 제사를 모셨는데 그것도 신통치 않아서 지금은 그만두었다고 했다. 회장님의 연세가 구십인데 자신도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필시 동제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 담겨있을 것이다. 이 마을에는 산골치고 유독 무덤이 많다. 무덤마다 남근을 상징하는 비석들이 서 있다. 남근을 세운 것은 조상님의 보살핌을 염원하는 의미였으리라. 자식을 여럿 낳아도 역병으로 잃어버리고 겨우 한두 명을 건졌으니 조바심이 났을 게다. 또한 풍년을 비는 마음도 읽혀진다. 마을 깊은 산중이라 천수답으로 농사를 지었으니 가뭄과 홍수로 먹고사는 것도 팍팍했을 것이다.
신통치 않았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더 이상 나무신, 돌신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과학문명과 의학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서 이리라. 댐을 만들고 수위를 조절하면서 농사를 짓게 되니 자연재해에 대처할 수 있어서 저절로 풍년가를 불렀으리라. 또한, 병이 들면 현대 의학의 힘으로 건강을 되찾게 되었으리라.
후손들은 정성을 다해 탑을 쌓고 복을 빌었던 조상을 잊지 않고, 동제를 지냈던 제단을 마을 한복판에 모시고 산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손하던 제단이 아니던가. 돌탑에는 단합된 힘으로 일치를 이루면서 재앙을 극복하고 풍요를 기원했던 사연들이 서리서리 묻어있다.
동제를 바쳤던 돌탑이 내게는 설치미술의 작품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과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한 개씩 쌓을 때마다 그들은 소원을 빌었으리라. 우뚝 솟은 가운데 돌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은근하다. 몸이 반응하는 것을 보니 나도 아직은 여자인 모양이다. 탑을 훔쳐보면서 관능이 꿈틀거렸으니 말이다.
돌탑의 모양을 보고 수치스럽다고 폄하하면 안 될 것이다. 휘영청 달이 밝으면 탑의 정기를 받아 종족보존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선조들의 삶을 떠올린다. 동제는 비록 멈추었지만 귀농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보니 음과 양의 기운이 쇠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돌탑은 무성하고 짙은 나무 그늘에 숨어서 지금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 뒤통수에 대고 회장님이 한마디 한다.
“참 나 원, 사흘 전에도 여자가 찾아와서 꼬치꼬치 묻더니만, 요새는 여자들이 어째 저 모양이고.”
‘거참, 회장님은 여자가 있어야 세상이 보존되는 것을 모르시는가 보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그것으로 되었다 / 곽경옥 (1) | 2023.12.27 |
---|---|
[좋은수필]겨울 편지 / 반숙자 (1) | 2023.12.26 |
[좋은수필]아포리아를 위한 신호등 / 박장원 (1) | 2023.12.24 |
[좋은수필]별 / 김이랑 (1) | 2023.12.23 |
[좋은수필]천상병이라는 풍경 / 김훈 (2) | 2023.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