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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아포리아를 위한 신호등 / 박장원

아포리아를 위한 신호등 / 박장원

 

 

신호등에 주행 등만 있다면 무용지물이다. 빨강, 노랑 그리고 푸른 신호가 있기에 신호들이다.

멈추고 기다리고 다시 출발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결국 그것이 편리하고 하나의 약속이기에 묵묵히 따른다.

작가가 바라보는 신호등이 있다면 바로 해안의 비평이다. 문학비평은 어쩌면 우뚝한 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작가가 나무와 더불어 훤칠한 키로 크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비평이다. 진실은 미움을 동반한다고 하였다. 기호에 맞는다고, 가까운 친구라고, 명성이 있다고 계속 푸른 사인만 보내면 결국 부도덕한 중립 존재로 남는다. 하나의 굽은 잣대로 척량하는 것은 모두를 수채에 떨어뜨리는 언짢은 관용이다. 글 자체를 안 보고 명성에 아부하는 세태를 경계하는 말이다.

시詩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다면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두고 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詩가 쓰일 것이다.

팔십 년을 가다렸다가도 서너 줄의 시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이며 이것이 바로 릴케의 여정이었다. 문학은 이런 지고한 정신과 외로운 고집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꽃을 피운다.

물론 작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비평도 작가의 처절하고도 냉철한 속내에 비례해야 한다. 한가하게 비평하려는 몸짓에는 미움만이 깊어진다.

비평은 문학에서 하나의 신호등이다. 출구가 없으면 열어주고 바른 길이 아니면 닫아 주는 그런 아포리아를 위한 신호등이어야 한다. 아무 때나 푸른 신호를 보내면 다시는 거기에 따르지 않는다. 비록 빨간 불을 주더라도 그것이 작가에게 맑은 피가 된다면 작가는 언제나 그의 뼈아픈 신호를 감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