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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한 장의 사진 / 김만년

한 장의 사진 / 김만년

 

 

이곳에선 섣불리 이별을 말해선 안 된다. 소리 내어 웃거나 함부로 셔터를 눌러서도 안 된다. 망배단에 엎드려 마른 눈물 글썽이는 저 노인의 비애 앞에서는 말이다. 거미줄 같은 육신에도 한 떨기 그리움은 남아 먼 북녘을 향해 엉거주춤 합장하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만 숙연해진다. 잠깐의 화해는 한때의 유행가처럼 흘러가고 만 것인가. 간간이 이산離散의 탄식만이 철책 너머로 달음질칠 뿐, 임진각은 다시 적막하다.

임진각을 돌아 나오는 길에 한국전쟁사진전시관에 들렀다. 사진은 참혹한 슬픔으로 인화되어 있었다. 오랜 관념 속에 박제된 죽음들이 여기선 아직도 물컹물컹 생동하고 있는 듯했다. 사살 명령이 떨어진 줄 오해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살려달라고 미군에게 애원하는 북한군 학도병, 죽은 엄마의 젖을 빨며 칭얼대는 어린 남매, 국군을 따라 피난 가는 긴긴 보따리 행렬, 그 하얀 비명들이 쟁쟁 귓가를 때린다. 전쟁은 한 사람의 광기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시신이 난무하고 죽음이 일상인 전장, 나는 검은 광기의 숲에서 황급히 달아나다 문득 한 장의 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단학살 장면이다. 한 여인이 시신을 찾고 있는 장면에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내 속에서조차 꼭꼭 밀봉해 둔 어머니의 비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어머니들의 은밀한 상흔을 저 사진 한 장이 웅변해 주고 있는 듯, 아프고도 섬뜩한 전율이 스친다. 어머니는 어느 폐족의 금서처럼 상처를 홀로 묻어 두고 살다가 가셨다.

"언니가 너들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고 하도 닦달을 해놔서 여태까진 내 아무 말 안 했다만, 인자 니 어매도 저승 갔고 니들도 마카 직장 잡았응께 알껀 알고 살아야 되지 않켔나? 에구 언니 불쌍도 하재, 모진 세상 질기게나 살아보잖코​…."

어머니의 비밀 보따리는 그렇게 풀어졌다. 이모님의 장탄식에 나는 찔끔 집히는 것이 있어 이야기를 재촉했다. 이모님은 1950년 칠월 어느 여름날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태어나기 십여 년 전쯤의 일이다.

전쟁 한 달 만에 인민군들은 외할아버지가 사는 경북 산간마을까지 진격해왔다. 군인들이 다급하게 퇴각하면서 좌익 명단에 오른 사람들을 마구 잡아갔다. 외할아버지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마을은 씨족 집성촌으로 이루어졌고 그 때문에 성씨가 다른 외할아버지가 지목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측해 볼 뿐이다. 외할아버지는 뽕밭에 똥을 주러 갔다가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그때 어머니 나이 열여덟이었다. 아버지에게 시집온 지 이태 만에 벌어진 일이다. 고평 나들로 빨리 가라는 마을 사람들의 기별에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마구 뛰었다. 나들엔 땡볕에 문드러진 시신과 화약 냄새만이 자욱했다. 외할머니는 끝내 시신 쪽으로 오지 못했다. 어머니가 시신​을 한 사람 한 사람 더듬던 중 단말마를 질렀다.

"엄마, 아부지 여기! 아부지이​…."

위 주머니에 있던 외할아버지 주민증을 보고 어머니는 당신 아버지를 찾아냈다. ​ 외할아버지는 간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바로 즉결 처분 되었다. 이모님 말씀대로 외할아버지는 "아침 잘 자시고 뽕밭에 갔다가 그 길로 멍석에 말려 앞산으로" 가셨던 것이다. 그 해 칠월 내내 장 꿩 같은 울음이 온 동네를 떠다녔다. 소문은 흉흉했고 사람들은 대문을 굳게 닫고 입을 다물었다. 며칠 후 외할머니는 어린 이모들을 외증조모님께 맡기고 외삼촌만 데리고 야반도주했다. 그리고 훨씬 훗날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모님의 눈물 콧물 사설이 종반부를 향해 목쉰 듯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 역시 이모님의 눈물 장단에 찔끔거리며 늦게나마 천 갈래로 찢어졌을 어머니의 그 말 없던 흉중을 헤아려 보았다. 열여덟은 요즘으로 보면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녀일 뿐인데 그 어린 눈으로 당신 아버지의 참상을 목도했을, 그때 어머니의 충격은 어땠을까. 그래서 외가댁과 왕래를 끊고 사셨던 것일까. 그래도 살아생전에 한번쯤은 자식들에게 장탄식이라도 내뱉었을 법도 한데, 어머니는 무엇이 두려워서 입을 굳게 닫으셨던 것일까. 당신 스스로도 외할아버지를 죄인으로 단정했던 것일까.

당시만 해도 '빨갱이'는 일종의 주홍 글씨였다. 노예의 화인火印처럼 빨갱이 집안이라고 낙인찍힌 폐족들이 발붙일 땅이 어디 있었으랴. 사방이 의심의 눈빛들이고 연좌제란 올가미는 사내아이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일찌감치 봉쇄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모질게 돌아앉았던 것이리라. 풍비박산 난 친정에 금단의 선을 그으셨던 것이리라. 새끼 품은 새는 날아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어머니는 친정보다 자식의 앞날을 걱정했던 것이다. 행여 그 붉은 화마가 자식에게까지 불어닥칠까, 상처 난 가슴으로 새끼들만 품었던 것이리라. 그 불모의 세월을 시어른들 눈치를 보며 매운 시집살이를 홀로 견뎠을 어머니, 지아비의 붉은 내력이 자식에게 미칠까 외삼촌을 데리고 낯선 곳으로 떠났을 외할머니, 그 시리고도 암울했던 시간이 저 빛바랜 사진 한 장에 덧 그려진다. 외가와 단절했던 어머니의 비정한 세월, 그 슬픈 공덕 때문일까. 다행히 지금 우리 삼 형제는 모두 공직의 길에 안착해 있다.

전쟁은 어머니의 시간에 일어났다. 어머니들은 폐허의 산맥을 피울음으로 넘어왔다. 눈물 한 보따리씩 머리에 이고 보릿고개를 넘어 오늘의 우리를, 나를 풍요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제 잠들거나 잠들어 가신다. 생각할수록 우리는 부모님 세대에 죄송한 자식들이다. 그저 전쟁을 박물관에 전시된 추억쯤으로 알거나 아니면 흥남이나 영도다리 밑으로 흘러가버린 노랫가락쯤으로 흥얼거린다. 전쟁을 함부로 말하거나 평화를 너무 쉽게 낙관한다. 통일은 정치의 수사로 덧칠되거나 머릿속 관념으로만 흐른다. 휴전선에 꽃삽을 들자면서 또 한편으로는 총구를 겨눈다. 이 두 지점에서 우리들의 어머니는 늘 아프다. 사진 속의 여인이 나에게 당부하는 것만 같다. '나의 슬픔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슬픔이니, 아들들아 부디 나를 바로 읽고 거기서 내일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라.'

얼마 전 외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전쟁 중에 희생된 150구의 합동위령제가 열린다는 것이다. 모두가 농사짓던 농민들인데 좌익이란 오명 때문에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억울한 원혼들이다. 늦게나마 역사의 햇살 아래 나올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나 역시 이제 외할아버지를 정당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도 지하에서나마 기뻐하실 것 같다.

흰 새 한 마리가 임진각 하늘을 날아오른다. 저 새는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았기에 멀리까지 날아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