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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하늘나리 / 조경숙

하늘나리 / 조경숙

 

 

나는 산에 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짙은 어둠을 밟으며 집을 나섰다. 느긋하게 정상에 올랐다가 능선 한 바퀴를 돌 요량이다. 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꽃 보는 재미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꽃이라면 식물원도 있고 정원도 있지만 산야에 저절로 나고 자라는 그들을 보면 소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삼십 년을 넘게 산에 올라 어느 자락에 무슨 꽃이 피는지 훤히 꿰뚫게 되었다.

계곡으로 접어드니 산수국이 절정이다. 꽃이 작은 산수국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헛꽃을 달고 있다. 수정되고 나면 그 헛꽃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초록색으로 변하니 자연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르겠다. 올해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세를 넓혀 온천지가 보랏빛이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몇 장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멀리 강렬한 주홍색이 시선을 잡아당긴다. 가파른 길을 조심스레 올라가 보니 사진으로만 본 하늘나리였다.

  여름은 역시 나리의 계절이다. 화단에서 흔하게 보는 참나리를 비롯해 하늘을 바라보고 피는 하늘나리,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않고 땅만 내려다보는 땅나리, 옆을 보고 피는 중나리까지 나리 종류도 많고 색깔도 모양도 다양하다. 참나리가 꽃이 크고 아름다워 진짜 나리라고 하지만 내 눈에는 하늘나리가 으뜸이다. 그래서일까. 거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이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 오직 하늘만 바라보는 자태로 오만함이 넘칠 정도로 도도해 보인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사진에 담으려니 손이 떨려 한참을 가슴을 누르고 길게 숨을 내뱉어야 했다. 내가 무슨 복이 많아 이 귀한 꽃을 만났을까.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리꽃만 한나절 무심히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누군가 걸어둔 팻말 때문에 일어나야 했다.

‘이 하늘나리는 귀한 꽃입니다. 제발 꺾지 마세요.’

행여 오해라도 살까 봐 서둘러 내려왔다. 문제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을 때였다. 갑자기 예전에 사고 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도 책에서만 보던 방울새난을 처음 만났었다.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이 녀석이 방울새난이라고 정말 귀한 꽃을 만났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생화 붐이 일어나 화원에서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하고 시골 장터에 가면 할머니들이 산에서 캐온 꽃을 팔 때였다. 그래서 그런지 정상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그 새 뿌리째 뽑아가 흔적조차 없어졌다. 비록 요염한 색으로 피어있어도 등산객이 오가는 길목이 아니라 눈에 뜨이기가 쉽지 않고, 봤다고 해도 흔하게 보는 나리꽃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불안하다. 오죽하면 멸종 위기 식물로 지정되면 그 식물은 곧 자생지에서 사라진다고 하지 않는가. 귀한 꽃이라고 명찰까지 달려있으니 도굴꾼이 아니라도 금방 캐 갈 것만 같다.

  꺾인 꽃은 다시 살아날 수 없지만 떨어진 꽃은 다음 해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있다. 씨앗이 맺히고 그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또다시 피어나 번식할 텐데 불안해 잠을 이룰 수 없다. 산에 피는 어떤 꽃이라도 집에 심으면 잘 적응하기 힘들다. 더구나 하늘나리의 꽃말이 길들지 않음이다. 1000고지 이상에서 피는 꽃이라 화단에 옮겨 심으면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다음 날 어둠을 밟으며 산으로 내달려갔다. 불길함은 적중했다. 사람은 절대 꽃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