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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정점 / 김선화

정점 / 김선화

 

 

피었다. 큰 품을 드리운 벚나무에 꽃이 만발했다. 고개를 젖혀 둘러보아도 벙글지 않은 송이가 없다. 둥실한 몸통을 찢고 나온 줄기에서도 벙싯 웃고, 아치형 너울의 가지에서도 망울들이 한껏 입을 열었다. 한데도 전혀 수선거리지 않고 우아한 품격이 느껴진다. 그 아래를 걷는 이들이 죄다 선계(仙界)의 그림이 된다. 나도 꽃잎을 이고 서성이며 그림 속에 묻혔다가 구경꾼이 되었다가 하는데, 불현듯 뜻을 이룬 사람의 흔흔한 모습이 연상된다. 그것이 묘하게도 팽이 치는 장면과 맞물린다.

팽이를 돌린다. 갸름한 끝점에 쇠구슬 박힌 나무팽이를 곧추세운다. 손가락 굵기의 채에 수술을 달아야 짝이 맞는데, 무턱대고 채찍질만 해대서는 팽이가 돌 리 만무하다. 몇 번 뒤뚱거리다가 나자빠지기 일쑤다. 우선 손에 기를 몰아 바닥에 세워야 하는데 이 과정이 녹록치 않다. 글 쓰는 사람이 온 정신을 가다듬어 서두를 시작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팽이가 막상 돌기 시작하면 몸뚱이를 채찍으로 돌려 쳐야 한다. 섣불리 힘만 써서는 실패하기 십상이고, 강약의 세기를 조절하며 밑동과 몸통에 고루 반주를 넣어야 탄력을 받는다. 문장의 호흡조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작은 것을 돌리기 위해 채찍을 든 사람은 등짝이 후줄근해지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다. 온몸의 기가 팔에서 손목으로 내리 달린다. 그다음 영육 간 최대의 기운이 팽이에 전이된다. 상념의 뜰에 투영되는 물상들이 걸러져 손끝을 통해 원고지에 가닿는 이치이다. 이러한 조율이 적절했을 때, 고맙게도 팽이는 빙글빙글 원을 그린다. 구상에서 구성으로, 구성에서 문장으로, 그리고 문장을 통한 의미들이 시나브로 글을 끌고 갈 때이다.

이 맛이 쏠쏠하여 팽이 윗면의 나이테를 따라 색을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나면 세상이 돈다. 둥그렇게 노랑, 빨강, 파랑…. 그 어우러짐이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로 다가온다. 무(無)에서 유(有)를 찾아 형상화 시키는 작가도 이때는 비로소 자기가 그려낸 생의 무늬를 확인하게 된다. 미온 상태였다가 점차 강렬하게, 그러다가 서늘하게…. 의미의 공간들이 축을 중심으로 자리를 확보한다. 그 언저리엔 아무리 미미한 샛가지들이라 해도 얼씬할 틈이 없다.

팽이의 회전에 가속도가 붙으면 채찍을 쥔 팔의 노동은 한결 줄어든다. 손목의 힘만으로도 가능하다. 쉬엄쉬엄 밑동을 건드려준다. 돌고 있는 것이 그 톤을 유지하게끔. 채찍이란 보조 장치가 있다는 정도만 알리면 된다. 그럼 그 깜찍한 것은 끄덕끄덕하며 맴돌다가 정정에 이른다. 도는 듯 제자리에서 반경 이동을 하지 않는다. 알록달록한 색상들도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채를 든 사람은 물론이고 구경꾼들조차 무아지경에 도달한다. 정점이다. 이를 두고 “동 섰다~!”고 너나없이 환호한다. 팽이치기에서 더 이상이 있을 수 없는 클라이맥스다. 채찍은 이미 무용지물이다.

나는 이제껏, 작가란 모름지기 그만쯤에서 정신적 자리에서 노니는 사람으로 보는 데 변함이 없다. 펜을 쥔 사람이 섬세한 정신운동에 의해 새로운 의미와 만날 때 진정으로 글 쓰는 맛을 누리게 된다. 다양한 색상이 입혀진 팽이가 정점을 향해 나아가며 혼합색의 조화를 이루듯, 만 가지 생각이 응집되어 커다란 의미 하나를 이루어내는 동안 고조된 기운이 한데로 몰리지 않는다. 이 기점을 흔히 신들렸다고들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추구하는 어떤 일에 있어 그만큼 열과 성을 다한 후라야 전자에서 맛보는 절정에 도달하리라. 그때까지 얼마나 거친 숨결을 가다듬어야 하겠는가. 생에 어느 과정인들 소중하지 않을까마는, 기쁨의 극점은 누구에게나 존중돼야 할 귀한 자리이다. 인생 전반을 돌아보아도 그러한 날들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한없이 박수 쳐줘도 넘치지 않는다. 그래서 무(舞)의 경지에서 정점의 환희에 에워싸인 사람의 아름다운 미소 곁에서 경건해진다. 도는 듯 멈춘 듯 덩달아 호응하며 묵시(黙視)의 결을 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