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똥구리 / 민명자
쇠똥구리는 이름처럼 똥을 굴린다. 그러나 이름처럼 쇠똥만을 굴리지는 않는다. 말똥도, 코끼리 똥도, 초식동물들이 싼 똥은 모두 굴린다. 제 몸무게의 오륙십 배나 되는 똥을 굴리며 먼 길을 가고, 똥에 알을 낳고, 알에서 깬 애벌레는 똥을 먹고 자라 종족을 번식시킨다. 똥은 쇠똥구리의 밥이고 집인 셈이다.
폐지를 줍는 이가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연말 분위기로 흥청대는 서울 명동, 밝은 동네의 어둑한 골목에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가 내 앞으로 가고 있다. 리어카 키의 두 배가 훨씬 넘게 묶인 헌 박스들이 앞을 가려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다. 리어카가 그냥 혼자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폐지는 사람들이 쓰고 버린 물질의 똥이다. 폐지를 줍는 이에게 그것은 밥이고 옷이고 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똥들을 자꾸 버려줘야 하나. 아껴 써야 하나.
그 골목 한쪽으로 리어카를 앞서가던 한 아주머니와 대학생인 듯한 딸이 멈칫멈칫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러다가 둘이서 우물쭈물하더니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딸이 리어카 앞으로 간다. "할아버지 이걸로 따뜻한 밥 사서 드세요." 딸의 손에 만원짜리 지폐 두어 장이 들려 있다. 어머니가 전하라고 시킨 듯하다. "아이구! 고맙습니다." 리어카를 끌고 가던 사람이 잠시 서서 몸을 뺀다. 나도 그 곁에 멈춘다. 그제야 모습이 보인다. 키가 작고 깡마른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자기 몸피의 몇 배나 됨직한 폐지들이 실린 리어카를 다시 끌고 간다. 바퀴가 기우뚱 기우뚱 구르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글쟁이가 있다. 완전 무無에서 有를 빚어내는 절대적 창조나 창작이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한 편의 글은 어디선가 듣고 본 것,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밥 삼아 살진 생명력을 얻는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공자나 맹자, 혹은 노자나 장자, 더더더 동서고금을 오르내리며 기타 등등등, 탁원한 사상가들이 남긴 철학적 사유나 지성적 언어의 부스러기들이 몇 줌 양식의 밑천으로 보태지거나, 자연 모방 인간 모방에 상상력이 버무려지기도 한다. 상상력은 개성이나 창의성의 뿌리가 되지만 그것도 실은 기시감이나 마음의 연못 깊숙이 자리한 무의식적 원형의 그늘을 비켜가기 어렵다. 그렇긴 해도, 다른 이가 상상의 힘으로 애써 지어 놓은 집에 있는 것들을 제 것인 양 슬그머니 갖다 쓰는 것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그건 정신을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여하간에 타자가 흘린 삶 혹은 알게 모르게 학습된 지식의 찌꺼기들을 먹이 삼아 생각이 알을 낳고, 큰 덩이 작은 덩이 언어의 조각들을 뭉치고 굴려 눈 코 입이나 손발을 붙여서 새로운 존재들이 글로써 탄생한다. 남루한 현실에서 좀 더 나은 향방을 위해 긁어모은 어절들, 그 절망과 희망의 언어들을 또 다른 이가 섭취하고 변용하고 보태고 배설하는, 쇠똥구리 같은 세계는 거듭 이어진다.
건축가는 아무리 설계를 멋지게 해도 재료 없이는 집을 짓지 못한다. 건축가의 집짓기 재료는 글쟁이의 언어와도 같다. 옹기장이는 흙과 불가마가 있어야 옹기를 굽고, 흙과 불가마는 옹기장이 손길을 거치지 않고서는 저 홀로 옹기 탄생을 도울 수 없다. 지휘자와 악보와 악기 사이가 그러하듯, 사과의 낙하에서 만유인력이 태어나듯, 예술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홀로 완성되는 것은 없다.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일용품도 대자연과 다른 이의 손길이 합해져 우리에게 온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변기에 앉아 흘려보낸 배설물들, 더러는 정화되고 더러는 정화되지 않은 물들은 섞여 땅으로 바다로 흘러들고, 그 물을 생명의 씨앗 삼아 자란 푸성귀와 물고기와 해초들은 다시 우리 몸에 공양물로 흘러와 뼈와 살을 빚는다. 위로 들어온 것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것은 다시 위로, 서로 갈마들며 순환하는 우리의 생.
우리는 그렇게 천지만물이 주는 혜택과 누군가가 해낸 성과에 조금씩 기대고 빚지면서 하루하루를 보태고 더부살이를 하면서 삶을 이어간다. 세상에 넘쳐나는 물질과 정신의 똥, 그것들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일에 N의 수를 더하며 존재의 집을 짓고 산다.
똥도 쓰는 이에 따라서는 요긴한 거름이 되고 땔감도 되고 악취 풍기는 오물도 되나니 똥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닐 터, 똥에도 도道가 있다 하고, 부처님은 분소의糞掃衣를 입으셨다 하니, 나도 운수남자雲水衲子처럼 욕심 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버린 누더기 조각조각 줍고 기워 가사袈娑라도 지어 걸치면 道라는 큰 나무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으려나.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십 년 삼천육백오십여 일, 백 년 천년 쌓이고 쌓이는 시간을 이으며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이 윤회의 굴레 바퀴 속을 구르며 간다.
현실과 이상, 슬픔과 기쁨, 사랑과 미움, 소유와 무소유 등 서로 부딪치고 어긋나며 각진 파편들을 한데 모아 화해나 조화라는 이름으로 둥글게 둥글게 굴리며 둥근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며 살아간다. 산다는 건 섭취와 배설이고 굴림이고 굴러감이다.
쇠똥구리가 똥을 굴리듯, 이 둥근 지구별에서 물질과 정신과 용감의 집을 지으며 유전流轉하는 인간 존재들, 어쩌면 쇠똥구리와 우리는 전생에 친적이었을지도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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