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강변에 살면서 / 설성제

 

 

여유를 가지고 가만가만 흘러가는 강이 아름답다. 강은 바람의 발자국으로 수없는 물결을 이룬다. 이른 새벽에는 안개를 피워 올려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 어디쯤에 작은 섬들을 두어 풀들을 자라게 하고 새들이 와서 한가롭게 놀게도 한다. 늘 앞산의 그림자를 품어주고, 마주하는 하늘의 구름들까지 품어주며, 다가가는 것은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집 앞에는 강이 있다. 그 강은 영남의 명산인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울산만으로 흘러가는 태화강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강가의 마을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강변은 다듬어진 산책로가 있고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었다.

사계절 내내 강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채 천천히 걷는 사람도 있고, 빠른 걸음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듯 숨차게 뛰는 사람들도 있다. 다정하게 손을 잡은 연인이 이야기하며 걷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걷고 뛰며 가슴속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강변에 나온 이런 사람들의 움직임이 여름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는 긴 물결을 이룬다. 강은 밤낮없이 찾아오는 사람의 물결을 다 포옹하며 말없이 흐른다. 누군가 비애에 젖어 마시고 던진 술병도 받아주고 사랑에 몸부림치는 아픈 마음도 어루만져 준다. 강변에 나오는 ​사람들은 강의 넓은 마음을 다 아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발길을 강변으로 돌리곤 한다.

강변에 오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나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어린 시절 나는 경사진 계곡물처럼 매사에 성급했다. 그때 나의 물은 맑고 깨끗했을망정 여유로움이 없어 실수가 잦았다. 강가의 숲에서 들려오는 주옥같은 새소리에 귀 기울일 줄 몰랐고, 낙엽 한 잎 넉넉히 품에 안을 줄도 몰랐다. ​마냥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흘러왔다. 그러다가 힘없이 급류에 휘말려 들기도 하고 느리고 둔한 굽이를 만나 시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또 어느 이름 없는 교각에 걸려 소용돌이치기도 했으며, 겁 없이 폭우와 태풍 사이를 훑으며 지나갔으리라.

나는 바다를 꿈꾸는 강물이었다. 유수를 따라 이쯤에 오고 보니 이제는 평온히 흘러가는 강 같은 사람이 되길 꿈꾼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들추어내지 않고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굳이 더 넓고 깊은 바다에 당도하지 않더라도 괜찮겠다.

올해에는 정말 많은 비가 내렸다. 열흘이고, 보름이고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리는 기상 대 이변이 일어났다. 강이 꼴깍꼴깍 숨이 넘어갈 듯한 범람 위기까지 갔다. 물의 놀라운 위력, 자연의 막강한 힘과 자연의 분노를 보았다. 그 원형의 자연 앞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내가 앉아 쉬었던 강변의 계단들이 모두 물속으로 잠긴 것을 보자 나 자신이 깊은 수렁 속으로 아득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수렁은 깊고 두려웠다.

​강은 사람들의 발길을 막듯 산책길을 지우고 혼자 깊은 신음을 하였다.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멈추고 불은 물이 빠져나가고 보니 강은 속엣 것을 다 토해놓았다.

큰비로 황폐해진 강변으로 나갔다. 폭우를 견디다 못해 내지른 절규처럼 군데군데 가녀린 나뭇가지의 무더기가 널려있는가 하면 인간이 버린 욕망의 찌꺼기, 온갖 생활의 폐품들이 떠 내려와 널려 있었다. 강바닥 깊은 곳에 옹이처럼 박혀 있었을 가재도구들도 올라와 있고, 강둑의 풀들은 머리를 헤친 채 늘어져 있었다.

그런 폐허의 강변에서 강이 품고 있는 마음을 보았다. 강이 조용하고 여유 있게 흐를 수 있었던 것은 강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던 미세한 흙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폭우로 강이 뒤집히면서 강변 산책길로 올라온 황토색 흙은 강의 부드러운 마음이었다. 캐시미론 담요처럼 펼쳐져 있는 황톳빛 흙에도 바람이 지나간 대로 결이 졌다. 흙의 결은 물결과 똑같아 보였다. 나는 세상을 밟고 지나온 무거운 신발을 벗어들었다.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흙의 결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다. 이대로 흘러 더 넓고 깊은 강의 가슴에 가닿고 싶었다.

아픔을 겪고 난 강의 얼굴은 아름답다. 무덥던 기운이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함이 감도는 구월의 강은 다시 평온을 찾아 묵묵히 흘러간다. 폭우에 맞아 입었던 상처들은 아물어가고 서서히 물들어가는 산색을 품으며 제 빛을 찾아간다. 바다의 밀물 때문인지 역류하듯 꿈틀거리다가 또다시 흘러간다. 여름 불볕에 바싹 타올랐던 강둑의 풀밭에서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성숙한 풀들과 모양새는 보이지 않는 착한 곤충들이 대화하는 소리 같​다.

강변도로에는 자동차들이 하나둘 불빛을 쏘아대며 달린다. 나는 서로 반대되는 세계의 사이에 서 있다. 어느 누구나 저 강에 서면 저렇게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돌려보면 말없이 강이 흐르고 있다. 남을 앞서가겠다는 불빛도, 서두름도 없이 가만가만 흘러 서 가고 있는 곳, 그 넓은 세계로 가는 강의 여정은 고요하기만 하다. 말 없음만큼이나 강의 가슴은 깊다. 깊을수록 더 고요히 흐르는 강의 자태다. 어쩌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서두름'과 '가만가만'의 사이일지도 모른다. 둘 다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어느 것이 아름답고 어느 것이 추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업다. 하지만 하나를 택하라면 강물처럼 가만가만 흘러가는 쪽이고 싶다.

강변에 서면 어느새 강을 닮아가는 듯하다. 저 아래 바다가 있는 하늘 끝으로 수평선이 보이는 것도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