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산다 / 최민자
새가 날아간다
노을 진 하늘가에 새들이 날아간다.
마른 씨앗을 삼키고 뼈 속을 비우고, 새들은 그렇게 만리장천을 건너간다. 날아가는 새들이 쓸쓸해 보이는 건 가을이 어지간히 깊어졌다는 뜻이다.
둑이 일렁인다.
바람 부는 강둑에 억새밭이 일렁인다. 몸 안에 남아있는 마지막 물기까지 바람결에 훌훌 날려버린 풀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휘청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중심을 잡는다. '드러누우면 끝장이야.' 저희끼리 그렇게 사운대는 것 같다.
강이 뒤챈다. 부드럽게 간질이다 격렬하게 파고드는 바람을 안으며 강은 은밀하게 속삭여 줄 것이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존재는 당신뿐이야.'
새가 날고, 풀이 눕고, 강이 뒤척이는 가을 물가에 앉아, 나는 어쩌면 살아있다는 것은 흔들린다는 것과 같은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있기 위해 강물은 쉬지 않고 출렁거리고, 나무도 팔을 치키고 운동을 하지 않던가.
정신없이 내달리는 세상을 따라잡느라 중심을 못 잡고 허둥거리다 보면 지구가 뒤집혀도 흔들리지 않을 공고한 소신이 부러워지곤 한다. 마음 복판에 철심을 박고, 왼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의연하게 버텨 낼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날엔, 나도 그냥 흔들리고 싶다. 쨍한 가을볕에 습습한 울기鬱氣를 말려버리고, 가볍게 자유롭게 하늘거리고 싶다. 흔들리지 않는 삶이 무슨 재미란 말인가. 밤하늘의 별도 흔들거리고, 꽃도 바람에 흔들리며 피는데, 흔들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젊은이들도 있지 않던가. 흐르지 않는 물이 썩게 마련이듯, 흔들림이 없는 일상엔 떨림도 울림도 찾아들지 않는다. 삶도 사랑도 흔들거리며 기우뚱기우뚱 자리를 잡아간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젊은 처녀 하나가 지그재그로 비끄러져 간다. 노란 헬멧 뒤로 나부끼는, 긴 머리카락이 눈부시다. 그림자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키 큰 은사시나무 가지 끝에 몇 잎 남지 않은 가을이 떨고 있다. 살랑이는 물결, 수런대는 갈잎, 이따금씩 건들거리는 낚시 보트.... 바람 부는 강가에서 바라보는 가을은 흔들리는 것들로 아름답다. 아름답게 흔들거리는 이 세상 풍경을 내려다보노라면 신도 가끔은 흔들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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