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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꽃이 피었네 / 안재진

꽃이 피었네 / 안재진

 

 

온 뜰이 봄빛으로 가득하다. 그 빛살에 가슴이 뜨거운 듯 꽃들이 화들짝 피었다. 지난봄에는 여린 가지 몇 곳에만 간신히 실눈을 뜨듯 움을 틔우더니 이내 지고 말았다. 그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이제 살 만큼 살았나 보다 하고 별반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박태기랑 라일락이 생기를 찾아 이렇듯 화사하게 웃고 있으니 마치 잃어버린 얼굴들이 되살아나듯 감격스런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나에게 잘못이 크다. 가끔 들르면서 잡초라도 뜯어주었더라면 그렇게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이사를 떠나면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고, 설령 찾아온다 해도 오래전에 지은 집이라 생활하기에 무척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차라리 방치하게 되면​ 언젠가는 허물어질 테고, 만약 다시 찾게 되면 그때 새 집을 짓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시골집은 해마다 황폐해지고 있었다. 건물의 골격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지만 넓은 마당은 온갖 잡초가 덮여 마음 놓고 발길을 옮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이름 모를 덩굴 잡초가 극성을 피워 무슨 터널처럼 꽃밭 전체를 휘감은 것이었다. 결국 유달리 키가 큰 벽오동을 제외하곤 대부분 주눅이 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못 본 체 무관심했다. 가슴이 저릴 만큼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이미 방치하겠다고 마음먹은 터였고 또한, 그것들을 제거하기에는 너무나 어지럽게 변하여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세상살이처럼 버리겠다고 다짐했던 옛집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제법 정성 들여 집 안팎을 수리하고 아울러 뜰 구석구석을 손질하였다. 하지만 그토록 곱게 피었던 여러 종류의 장미는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홍매화랑 뱀무도 보이지 않았다. 뜰 가장자리에 긴 여름 동안 날마다 피고 지며 고운 자태로 나폴거렸던 채송화 무리도 보이지 않았고, 금매화, 봉숭아, 수선화, 샤프란, 달리아를 비롯하여 꽃이 아름다워 이름도 모른 채 심어놓은 갖가지 화초들이 몽땅 잡초들의 극성에 밀려난 모양이었다. 그나마 간신히 연명한 것은 작약과 모란, 붉은 열매가 꽃잎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낯선나무, 박태기랑 라일락 정도였다. 그것도 곁가지 대부분이 말라붙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였다.

그래서 딸아이 내외에게 부탁하여 목련이랑 벚나무 몇 그루와 핏빛보다​ 진한 연산홍 백여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물을 뿌려주고 자양분이 될 만한 비료도 뿌려주었다.

그런 노력에 감화되었는지 꽃자리를 깔아놓은 듯 연산홍은 활짝 피었고, 박태기 라일락도 생기를 찾아 눈부시게 웃고 있어 내 젖은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

문득 세상만사는 그냥 굴러가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관심을 갖고 사랑을 나누며 의지하고 다독일 때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말 못 하는 풀포기도 가꾸고 다듬으니 이렇게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랴. 미워하고 박대하면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가 정신이 황폐하고, 버려두었던 꽃나무처럼 앙금과 아픔만 안고 사라질 것이 아니겠는가. ​

진실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돌리면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거룩함이 스며 있는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 같아 고개가 숙여진다. 아니 그런 사색이 전혀 없었던 게 아니라 순간순간 고뇌하고 성찰하는 기회도 있었지만 돌아서면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몇 해 전 갑작스런 병고로 잠시 입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심상치 않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졌고, 만약 완치된다면 남은 생애는 반드시 모든 걸 버리면서 인간답게 살 것이라 생각했으나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옛날 그 자리로 돌아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일까. 다른 생명처럼 천부적으로 맡겨진 순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높고 화려하고 그윽한 자리만을​ 탐하는 허욕과 오만으로 가득하니 말이다. 가장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하면서, 진실하고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서, 결국 인간 스스로의 욕심만 채우려는 빈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문명이니 진보니 발전이니 임인이니 하는 주의나 사상도 역시 인간만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간사한 주문에 불과한지 모른다.

꽃나무도 마음을 주고 정성을 쏟으니 이처럼 불꽃같은 꽃을 피워 기쁨으로 되돌려 주는데 나는 무엇을 세상에 내놓았는지 착잡한 심정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자연과 신성의 질서를 더럽히는 가장 저열한 존재라 이른다면 잘못된 생각일까.

나는 집 뜰을 가꾼 것이 근래에 저지른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즐거워한다. 얼마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하면 잠을 설치는 한밤중에도 꽃나무 주위를 서서이며 얘기를 나누려 시도한다. ​그러나 꽃들은 말이 없다. 다만 전류처럼 내 마음에 흘러드는 가장 진실한 사라의 얘기를 두런거림으로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