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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한겨울에 싱건지국만 마시던 여자 / 한승원

한겨울에 싱건지국만 마시던 여자 / 한승원

 

 



한 겨울이었다.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 여자는 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나를 데리고 시장엘 나갔다. 하늘에는 시꺼먼 구름장이 덮여 있었다. 금방 함박꽃 송이 같은 눈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 여자는 김 보따리를 시장 바닥에 폈다. 김은 비나 눈을 맞기라도 하면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악천후가 예상되던 그날도 그 여자는 나를 앞세운 채 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시장엘 나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절박했다. 그날로 내 손에다가 두 중학생의 등록금을 쥐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악천후가 예상되는 날에는 김값이 무르게 마련이다.
파장이 되어가면서 그 여자는 김을 사려고 기웃거리는 상인의 소매를 잡아끌며 통사정을 했다.
상인들은 냉담했다. 통사정을 할수록 매정스럽게 김값을 훑었다.
가까스로 김을 넘겼을 때 눈송이들이 흘러내렸다. 그 여자는 나한테 등록금과 용돈 몇 푼을 챙겨 주고 시장 밖으로 나섰다. 버스 뜰 시간이 아직은 멀었다.
“돼지고깃국을 한 그릇 사 먹일려고 했더니 돈이 부족해서 안 되겄다. 뜨끈뜨끈한 팥죽이나 한 그릇 먹고 가거라. 그 동안 추워서 많이 떨었지야?”
그 여자는 팥죽가게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팥죽솥 뚜껑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솜옷을 두둑하게 입은 팥죽장수 아주머니가 팥죽 퍼 줄 채비를 하면서 그 여자와 나를 번갈아 살폈다.
“팥죽 드릴까라우?”
“한 그릇만 주시오.”
팥죽장수는 한 그릇만 달라는 그 여자의 말에 적이 실망을 한 채 팥죽 한 사발을 간이 탁자 위에 놓아주었다. 그것은 나 혼자 먹기에도 간에 기별조차 가지 않을 듯싶게 양이 적었다. 팥죽장사는 숟가락 한 개와 입가심을 할 수 있는 싱건지국 한 종지를 내주었다.
“배 고프겄다. 얼른 먹어라. 따끈한 이놈 먹으면 속이 풀리겄다.”
나는 그 여자의 뱃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장에 나오느라고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나는 밥 생각이 없다. 아침에 먹은 게 체했는지 어쨌는지-- 싱건지국이나 한 모금 마실란다.”
하면서 억지 트림을 해 보였다. 팥죽장수 아주머니에게 숟가락 한 개를 더 달라고 했고, 그 숟가락으로 싱건지국물을 한번 떠 마시며
“아따, 시원하다.”
하고 말했다.
나는 가슴이 아파 팥죽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싱건지국물을 마시는 것만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순간 그 여자가 나를 꾸짖었다.
“너는 먹을 것을 보면 서둘러 달게 좀 먹어 봐라.”
그 여자는 어느 사이엔지 싱건지국 한 종지를 다 마셔버렸다. 내가 입가심할 것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 여자는 팥죽장수 아주머니에게서 싱건지국 한 종지를 더 얻어내기 위하여 비굴한 목소리로 아쉬운 말을 했다. 한 사발을 마시고 다시 한 사발을 달라고 했다.
팥죽장사 아주머니의 눈꼬리가 매섭게 찢어졌다.
“날씨까지 춥구만 웬걸 그렇게 마시는고?”
하고 강파르게 말을 하더니 놋대접으로 싱건지국을 퍼다가 그 여자 앞에 놓아주었고 그 여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 날 팥죽맛을 알 수 없었다.
뽀얀 눈보라 속에서 나와 그 여자는 헤어졌다. 뜨거운 팥죽 한 사발을 먹은 나는 버스에 올랐고, 팥죽장수 아주머니의 눈치 어린 싱건지국만 마신 그 여자는 눈보라 속을 뚫고 신작로를 걸어갔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자는 내 의식 한 자락 속에서 그렇게 그 눈보라 속을 뚫고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