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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십구공탄 / 류영택

 십구공탄 / 류영택  

 

 

 

 어둠속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조심조심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작은 불빛이 점점 커진다. 참았던 숨을 내놓는 순간 십구공탄에는 보름달처럼 동그란 불이 켜진다. 식당아줌마의 연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더 용이 쓰인다.
  큰일을 해낸 듯 싱긋이 웃는 아주머니는 서둘러 바닥에 놓인 연탄재에 불집게를 내리꽂는다. 보나마나 휘휘 돌려서는 가게 옆 공터를 향해 날려 보낼 것이다. 공터에는 온전한 연탄재가 하나도 없다. 
 문을 나서려던 아주머니는 연탄재를 내려놓고 급히 방으로 들어간다. 전화벨 소리가 귀청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을 보니 어디서 배달주문이 온 것 같다. 나는 힐끔 방문 쪽을 바라보다말고 연탄재에 시선을 내려놓는다. 정말 구멍이 열아홉일까? 하나, 둘, 셋, 넷 수를 세는 눈길에 실루엣이 따라붙는다. 잊은 줄 알았는데. 긴 동선을 따르던 검은 그림자가 어느새 김 노인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김 노인은 우리가게 단골손님이었다. 원체 말이 없는 노인이라 수년이 지나도록 어디에 사는지, 슬하에 자식이 몇인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처음 가게를 찾아왔던 김 노인의 모습을 생각하면 결코 웃을 일이 아닌데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된다. 
 제대로 굴러가기나 할까싶은 낡은 차에서 체구가 왜소한 노인이 내렸다. 얼핏 봐도 일흔은 넘어보였다. 저 몸으로 어찌 일을 할까. 꾸부정한 허리에 금세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매단 노인을 보니 안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차에 그 운전사' 같아 나도 모르게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다.   
 노인은 이제부터 거래를 트자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통성명을 했지만 나보다 스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어른에게 뭐라고 부를 것인지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가끔 김 노인을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말은 그럴싸하게 정화조차라 부르지만, 실상은 '재래식 화장실' 분뇨를 퍼는 차를 몰고 있지 않는가. 운전만 하면 그나마 괜찮다. 바싹 마른 몸으로 긴 호수를 끌고 골목을 나드는 것도 힘에 부칠 것 같았다. 젊어서 뭣했기에 저 나이가 되도록 일을 하지. 자식도 없나? 미루어 짐작해보니 젊어서 바람을 피웠거나 그것도 아니면 투전판을 전전하다 재산을 탕진했을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측은해 보이던 노인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하루는 금이 간 분뇨탱크를 용접을 하게 됐다. 전등불을 밝히고 탱크 안에서 작업을 하다 입구 쪽을 바라보니 노인은 뚜껑을 들어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그 구멍은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구 역할도 하지만, 옆에 난 작은 구멍으로 들어온 찬 공기와 통속의 덥혀진 공기를 배출하는 통풍구 역할을 한다. 깔때기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분뇨가스와 용접봉을 태운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곳이라 탱크 안에 들어앉은 것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난다. 저러다 가스에 질식을 하지. 아무리 내려가라고 해도 노인은 막무가내다. 걱정이 된 나는 일을 하다말고 입구 쪽으로 나왔다. 
 "영감님, 빈틈없이 작업할 테니 걱정 말고 내려가세요."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을 하다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왔는지 탱크 안으로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노인이 걱정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노인의 모습에 화가 났다. '저 노매 영감탱이 누구 잡을 일 있나!' 아래로 내려가라며, 탱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오해 말게”
 새참을 먹던 나는 김 노인을 바라봤다. 빙그레 웃고 있는 그의 눈빛에는 행여 대충 일을 하지나 않을까 의심이 가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두 번 들어가기 싫은 곳이니 꼼꼼히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일에 집중하다보면 가스에 질식할 수도 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못 본 사이 노인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가. 나는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안경너머에 비친 노인의 눈이 더 깊게 들어가 있었다.
 "몸이 안 좋으세요?"
 노인은 대답 대신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노인은 내 손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이제 끝났네." 
 무엇에 놓여난 듯 덥석 내 손을 감싸 잡는 노인의 얼굴에는 만감이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노인은 막내 손자의 마지막 대학등록금을 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혼자 가슴앓이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활활 타오르는 연탄처럼 노인에게도 젊은 시절 그야말로 펄펄 날 때가 있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남의 집 화장실 분뇨를 퍼는 일은 변함이 없지만, 소달구지에 분뇨를 퍼 나르던 그 시절에는 돈이 되었다. 분뇨를 가득 싫은 달구지를 끌고 시외를 벗어나면 서로 자신의 밭에 분뇨를 뿌려달라며 사정을 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이쪽저쪽, 양쪽에서 돈을 받았다.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있을까. 김 노인은 '똥'퍼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젊었을 때 이야기고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재래식이 수세식으로 다 바뀌어버렸다. 진작 일을 그만 두어야 할 김 노인이 허 생원의 늙은 당나귀나 다름없는 고물정화조 차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사업에 실패한 큰아들을 대신해서 손자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형편이 괜찮은 자식들에게 짐을 나눠지게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럴 돈이 있으면 제 자식 유학 보내지 형님을 대신해서 조카 공부시킨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그나마 자신이 건강하니, 지금까지 정화조차를 운전하게 된 것이다.
 자리 잡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할 텐데. 손자가 취직하는 것을 보고 일을 그만 두려고 했는데. 막상 등록금을 내고나니 맥이 탁 풀어져 버린 것인지 마음 같이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며 쓸쓸히 웃음 지었다.  양 무릎에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인의 바짓가랑이가 가늘게 떨려왔다. 저 힘으로 어찌 가속페달을 밟을까.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식어가는 연탄처럼, 김 노인은 자신을 지탱할 힘마저도 다 소진해버린 것 같았다.

  "잘 있게" 
 가게를 나서는 노인의 그 말에 나는 씽긋 웃어보였다. 어쩌면 마지막 듣게 되는 말일지도, 다시는 볼 수 없는 노인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를 일인데. 나는 그렇게 노인을 떠나보냈다.
 나는 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빙빙 연탄재를 던지려다말고 종종걸음으로 공터를 향한다. 미지근한 온기조차도 남기지 않고 하얗게 자신을 태워버린 연탄이 못내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