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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너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노라 /구활

 너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노라 / 구활

 

 



“내, 너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노라. 황진이, 너는 나의 경전이며 염불이다. 너는 내가 찾고 있던 부처의 산 모습이다.”
송도 기생 황진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 속에 조연으로 등장하여 항상 피탈칠만 당하는 지족 선사의 속마음을 헤아려 본 이는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지족 선사는 면벽 가부좌하고 견성성불하기를 기다려 온 삼십 년 참선 세월을 황진이를 만난 하룻밤 파계로 야사(野史) 속에서 영영 구제 받을 수 없는 패륜승려로 머물러 있다.
지족 선사는 당시 화담 서경덕과는 쌍벽을 이루는 학식과 지혜가 뛰어난 승려로 누구에게나 우러름을 받아 온 유명 인사였다. 그는 선승으로 기거하고 있는 지족암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무(無)’자와 같은 풀리지 않는 화두 하나를 들고 용맹정진하고 있었다.
그는 누구의 꼬드김이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가 입 닦고 돌아앉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 땔 그런 위인은 아니다. 그의 앞에 일어날 사악한 일은 시초부터 경계했으며 특히 여자 중생은 선에 방해될까 봐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런 어느 날 서화담에게 접근하다 실패한 황진이가 지족 선사를 다음 목표로 겨냥하고 다가왔다. 황진이는 선사의 제자가 되어 수도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지족 선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지족 선사는 숭앙받는 승려로 남아 있었다.
가만히 있을 황진이가 아니었다. 며칠 후 소복단장에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 선사 바로 옆방에 침소를 정하고 죽은 남편을 위한 백일기도에 들어간다고 소문을 냈다. 그녀는 야심한 밤에 손수 지은 축원문을 울음 섞인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읽으니 그 목소리가 하도 맑고 청아하여 법당에 앉아 있는 부처님조차 항마촉지인을 풀고 귓가에 손을 댈 정도였다.
지족 선사도 승려 이전에 남자였다. 황진이가 암자에 들어온 후에는 염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생각 속에는 마귀 떼가 득실거려 가부좌한 두 다리가 후들거려 참선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 동안 갈고 닦아 온 마음 거울은 하루아침에 황진이의 요염기로 가득 찼고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지족 선사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마태복음 5장 28절의 말씀을 읽진 않았겠지만 생각만큼은 그 언저리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선사는 마음으로 간음하느니 차라리 실행에 옮겨 욕을 먹으면 먹고 역사에 죄인이 되면 되는 이판사판의 길을 택한 것은 혹시 아니었을까. 따지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거짓말하고 오리발 내미는 우리나라 정치인들보다는 백배 천배 양심적이다.
지족 선사는 파계한 후 제 발로 지족암을 내려와 야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황진이를 범한 오입쟁이가 아니라 한 시대의 풍류객이다. 난봉꾼은 여러 여자를 건드리지만 진짜 풍류객은 단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명예를 던진다. 지족 선사는 그런 사람이다.
무릇 사람이나 역사에는 운명이라는 게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흥과 망이란 갈림길에서 단숨에 진로가 바꿔지기도 한다. 예수에게 사단이 찾아와 “교회 첨탑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한 것이나 선사 앞에 황진이가 찾아와 제자가 되어 수도하기를 청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성불이나 해탈은 맨몸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영혼이 혼미해지는 지독한 과정을 겪은 후라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을 격고 나면 해탈도 별게 아니다. 내가 부처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부처가 내 몸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황진이의 살 속에 선사의 살을 박는 그 순간에 해탈은 시작되고 완료된다.
고뇌 또한 별게 아니다. 해탈하기 전의 근심거리이지 해탈한 후엔 번뇌란 단어 자체가 무의미하다. 해탈은 대자유의 무한 바다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신라 승려 원효는 자장과 함께 당나라로 향하다가 해골바가지에 들어 있는 빗물 한 모금을 마시고 느낀 게 있어 그 길로 신라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가 허리춤에 조롱박을 차고 뛰고 춤추며 서라벌 장안을 돌아다닌 것은 해탈의 무한 바다에서 자유스런 유영을 즐긴 것에 다름 아니다.
지족 선사도 파계하기 전에는 경전과 불법에 얽매여 있는 작은 암자의 늘푼수 없는 승려에 불과했다. 그는 황진이를 만나 해탈했고 진짜 부처가 되었다. 한 여인을 만나 모든 것을 던진 영원한 풍류객 지족 선사가 한없이 그립고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