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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겨울 진달래 / 반숙자

 겨울 진달래 / 반숙자




「……엄마, 이 가을에 떠나다니요. 모두가 떠나는 아픈 계절에 …….」
막내가 보낸 엽서의 한 구절이다. 입영의 날짜를 받아 놓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고 떠나야 하는 모든 것의 아쉬움에서 낙엽에 띄운 글인 모양이다.
나는 엽서를 받아들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거기, 내 망막에는 지난 10년이 뒤바뀐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꽃나무 한 그루도 옮겨 심으면 뿌리내리는 몸살에 이파리가 바삭바삭 타 들어가는데 하물며 인간에게랴.
나는 실눈 속으로 꽤나 오랫동안 남모르는 몸살을 앓아 온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본다.
막내는 다섯 아이 중에 유달리 애를 태운 아이였다. 그 애가 국민학교 6학년일 때 생모를 사별하고 새엄마라는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세상에는 계모라면 이상한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진실한 사랑만 있으면 다 잘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온 나는 순간순간을 당황하고 실망하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냥하면서도 때로는 영악한 아이로 변하기도 했다. 귀청을 후벼 주다가 자칫 잘못하면 아프다고 엉엉 울기가 예사요, 투정이 나오면 당할 재간이 없었다.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뒤의 일이다.
집안에 어린애가 없어 적적하다고 아주 귀여운 털부숭이 강아지 한 마리를 방에서 기를 때였다. 루비라는 이름의 강아지는 부엌 아이 등에 업혀 있기도 하고 내 치마폭에서 낮잠을 즐기기도 할 만치 재롱을 떨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 날 막내는 부엌에서 연탄집게를 찾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놈의 강아지 죽여 버릴 테다.」
아이는 살기 어린 눈으로 루비를 노려보다가 와락 달려들었다.
「안 돼, 안 돼.」
강아지를 뒤로 감추고 아이 손을 잡았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부터 나는 모정이 결핍된 아이의 여린 마음이 가여워 강아지를 밖으로 내놓고 말았다. 그러면서 섬뜩한 놀라움과 겹겹이 쌓여 가는 후회로 멍청하니 지내고 있었다.
아이는 겉으로는 별탈 없이 성장하였다. 위의 아이들은 서울 조부모님 댁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아이는 더 외로웠을 것이다.
막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외곬이던 성격이 점차 밝아져갔다.
학과 외에 테니스도 즐겨 치고 어떤 날은 납짝궁이 되어 버린 따뜻한 호떡 두 개를 책가방에서 꺼내 줄 때 나는 감지덕지 고마워하며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멀리 Y시 대학에 입학했다.
과수원과 논농사로 부족함을 모르고 지내던 가계(家計)가 욕심으로 시작한 양돈으로 궁지에 몰려갔다. 그 해에 심한 돼지 파동에 뒤이어 과일 시세 하락으로 셋째와 막내, 두 아이의 대학 교육비는 빈혈을 일으킬 정도였다.
주방에 가스조차 떼고 내핍에 내핍을 해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겨울방학에 막내는 한사코 서울 조부모님께 가 있겠다고 우겼다. 나는 어쩐 일인지 막내가 집이 싫어져서 그러나 하고 속으로 무척 섭섭하게 생각했다.
〈남의 자식 쓸데없어, 괜스리 나 혼자만 마음 아파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그쳐도 서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에 막내가 서울 지하도에서 복권을 팔고 있더라는 것이다. 한 번 들어앉으면 옴쭉달싹도 할 수 없이 좁은 공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니 따뜻한 방이 바늘방석 같고 보채 쌓는 아픔이 견딜 수 없게 했다.
「안 되겠어요, 당장 서울로 전화하세요, 어린것이 추위에 떨며 복권을 팔다니 말이 돼요? 부모가 없어요? 나는 못 봐요, 어서 내려오라 하세요.」
「제가 애써서 돈을 벌어 보아야 돈의 가치를 아는 거야, 한번쯤은 괜찮아.」
나는 그 날 밤 그이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
막내는 개학을 앞두고 꺼칠해져서 돌아왔다. 나는 차마 아이 얼굴을 바로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웠다. 큰 죄나 진 것처럼 전전긍긍한 나에게 아이는 피아노를 쳐주고 기타 치며 노래도 불러 주었다. 부엌 아이 없는 부엌일을 도와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나를 즐겁게 하려는 눈치였다.
하루를 지내고 막내는 학교로 떠나갔다. 고생만 시키고 보내려니 배웅하고 돌아서는 다리가 천근이었다.
서재로 들어가서 망연자실 서 있다가 무심코 시선 던진 책상 위에 흰 봉투 하나. 이상한 예감에 열어 보니 일금 만 오천 원과 막내의 낯익은 글씨였다.
「엄마, 추위에 고생이 많으세요. 세상은 지하도의 겨울바람처럼 차다고 하지만 나는 문제없어요. 열심히 살 거예요. 이 돈으로 꼭 가스 사세요. 막내가.」
작열하듯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 나는 편지를 와락 끌어안고 바쁘게 창문을 열었다. 아이는 보일 듯 말 듯 산모롱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아이가 걸어가는 눈길 위에 노을에 비낀 진홍의 진달래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겨울에 피어나는 인정의 꽃,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피워 낸 겨울 진달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