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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목련꽃 하얀 그늘 / 오혜정

목련꽃 하얀 그늘 / 오혜정

 

 

 

 화사한 봄날이다.
 목련이 단아한 자태로 발돋움하고 있다. 해마다 부활절 무렵이 되면 뜰안의 정적을 깨우는 꽃이다. 15년 세월을 한 울안에서 애환을 나눈 유정이 또 한 차례 사색의 향연장으로 이끌고 있다. 
 모과나무 앵두나무 라일락 산도화 보리수나무 향나무 산수유 등 여러 종류의 유실수와 관상목과 꽃나무들이 더러는 수한을 다하여 고사되기도 했고, 대부분 무단벌목에 의해 뜰을 떠나 버렸다. 황량한 뜰에 목련 나무만이 아직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 

 그는 조경에 대한 안목이 유별스럽다. 심플함이 지나쳐서 삭막하기까지 하다. 해묵은 나무는 꽃나무건 유실수건 그저 놔두지를 못한다. 수목은 사람과는 달라서 늙을수록 볼품이 있고 오밀조밀 멋과 운치가 근사하게 풍기는 법인데…. 
 자기 힘이 못 미칠 땐 인부를 불러들여서까지 가차없는 벌목의 톱질을 단행해 왔던 그였다. 연륜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해묵은 나무의 밑동이 통째로 잘려지고 뜰 모퉁이에 쌓여져 운치를 돋구던 통나무 토막 더미도 죄다 울밖으로 내쳐졌다. 초여름 한철, 뜰 안 가득 감미로운 향기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던 연보랏빛 라일락도 몇 해 전에 밑동까지 제거 당했다. 나날이 휑덩그레 비워져가는 뜰 안의 풍경에 삼 모자는 함구의 씁쓸한 눈빛만을 나누었을 뿐이다.
 숲이 우거져 집안 깊숙이 그늘을 드리우면 건강에 이로움이 적을 거라는 남편의 우려는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키가 그리 크지도 않은 꽃나무한테까지도 시시각각 벌목의 톱날을 휘두르는 그의 의도가 어느 땐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담홍빛 연산홍과 진분홍 철쭉을 현관에서 대문으로 이어진 육중한 돌층계 사이에 조성시킨 지는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안목이 깊은 조경사의 솜씨로 빚어낸 뜰 안의 경관이었다. 꽃이 만발할 때면 먼 곳으로 이사간 이웃들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돌과 꽃의 조화를 필름에 담으면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 경치를 유독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있다. 그는 이슬 내린 아침이나 비가 뿌리는 날, 우거진 고목 꽃가지에 옷깃 적시는 것이 성가시다고 불평을 했다. 철쭉 역시 언제 잘려지는 수난이 단행될는지 늘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렇듯 키가 작은 꽃나무들도 그의 눈에 거슬리는 판국에 키가 큰 목련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행히 뜰 한 모퉁이에 한적하게 서 있으니 그나마 은신처가 되어온 셈이다. 높이 뻗어오르는 정수리와 넓게 퍼져나간 옆가지가 꺾이고 잘리는 수난을 여러 차례 당하긴 했어도 위기의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다시 봄을 맞이한 것이다. 
 부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흰 옷자락을 꿈꾸듯 고고하게 펼쳐지는 꽃의 향연에 가끔씩 그의 눈길이 머문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까닭 없이 열적어진다.
 목련의 사계(四季)는 늘 새롭고 평화롭다. 
 잔잔한 봄날,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동실동실 떠 있는 하얀 목련을 바라보노라면 넓고 고요한 백련지(白連池)를 연상하게 된다. 끝없이 맑고 푸른 연못에 조각배를 띄우고 한유로이 노를 저으며 그윽한 꽃향기에 젖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세상 시름 다 잊고 한바탕 역부지몽(役夫之夢)의 호기에 잠겨보고 싶은 것이다. 

 꽃이 다 져버리고 잎사귀 철이 다가와도 목련나무엔 그윽한 분위기가 어린다. 한여름 불볕을 막아주는 타원형의 무성한 잎사귀엔 벌레가 꼬이지 않으니 더욱 신선하고, 권태로운 여름 뜰 안에 부채질 같은 청량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깊고 푸른 잎 그늘엔 지나가던 나그네새들이 지친 날개를 쉬어 가기도 하고, 느닷없는 소나기 세례엔 까막까치들이 비를 피하는 넉넉한 피신처가 되어준다. 산들바람 머무는 가을의 단풍도 곱고, 낙엽이 져버린 가지에 달린 털북숭이 겨울 꽃눈에도 섬세한 멋이 깃들여 있다. 밤사이 소리 없이 흰눈이 쌓인 아침, 가지와 꽃눈마다 만발한 소담한 백설의 연향은 스산한 겨울 뜨락에 또 한 차례의 경이로움을 선사해 주기도 한다. 
 백목련은 우윳빛 고고한 꽃빛깔과 단아한 생김새가 단연 꽃 중의 귀족이다. 향기조차 은은해서 더욱 기품이 있고 우아하다. 다만 수명이 짧은 것이 안타깝다. 순식간에 피어났다가 스러지는 꽃의 향기를 붙잡아 두고 싶어서 나는 목련꽃 필 무렵을 놓치지 않는다. 고이고이 채취한 꽃송이에 살짝 김을 들여 그늘에 건조시킨다. 우아한 향기를 간직한 목련차를 준비해 두는 것이다, 꽃진 자리에 돋아난 잎 그늘에 목련처럼 단아한 친구와 마주앉아 은은하게 우러나는 꽃향기를 오래도록 반추하고 싶었다. 목련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나누는 정담은 세속에 찌든 서운하고 답답한 얘기가 아닌 여운이 맑은 얘기였으면 좋겠다.
 사욕에 오염되지 않은 친구의 지순한 얘기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목련꽃의 여향-잠시나마 호연지기의 여유로움 속에서 시름을 잊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 소박한 꿈이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꾹꾸구 꾹꾸구….”
 머언 날을 꿈꾸듯 꽃가지에 앉아 읊는 멧비둘기의 노래가 뜰 안에 가득한 한나절, 목련꽃 하얀 그늘에 앉은 내 마음이 문득 어릴적 어머니 명주치마폭에 안긴 듯 푸근한 정감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