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 허창옥
안방 장롱 문양이 십장생 돋을 새김이다. 전체적인 느낌이나 색상, 나무의 질 따위를 두고 요모조모 뜯어 본 뒤에 선택한 것이다. 문양의 내용을 보고 사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누워서 가만히 보니 그저 산이려니 나무이려니 했던 것이 십장생이 다 모여 있었다. 창공에는 해가 떠있고, 그 아래 구름이 휘감고 있는 산에는 두어 그루 소나무가 휘어져 있다. 그 소나무에는 몇 마리의 학이 날아들고 산 중턱에서부터 쏟아지는 폭포가 이룬 물가에는 거북이가 있다. 또 물 언저리 낮은 바위에는 사슴과 불로초가 있다. 조금씩 다른 고만고만한 풍경이 여섯 짝의 장롱 문을 채우고 있다.
불로장생, 진시황의 터무니없는 소원이자 모든 사람이 은근히 바라는 바일 터이다. 그 소원이 그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화유전자를 제거해서 수명을 36%나 연장한다는 것이다. 너무 오래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하다가 그나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없어서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죽는 것이 싫지는 않다. 젊어서 한 때는 부정적인 세계관 때문에 죽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고, 지금은 한 생을 잘 살고 그 마무리로써 잘 죽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정도이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죽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고통, 특히 마지막에 오는 달말마의 고통이 무서울뿐이다. 그 고통이 면제된다면 일생을 살고 난 뒤의 긴 휴식이 왜 몸서리치도록 싫겠는가.
선배 한 분이 내게 말했다, 그 나이에 죽음이 소재가 된 글이 많은 게 아닌가하고, 그런 충고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죽음을 소재로 한 글이 몇 편은 더 나왔을 것이다. 죽는 것이 좋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이 나한테 그다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여러 차례 내가 사랑하던 아버지를,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 오빠와 이십년 지기 친구를, 그리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 계신 부모님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랑하고 그립기 때문에 글을 쓰는데 그 대상이 살아있지 않을 뿐이다.
이별하는 것은 슬프고 사별하는 것은 비통하다. 그 비통함의 뒤에 죽음에 대한 사유가 생긴다. 아주 어렸을 때는 뭐가 뭔지 몰랐지만 자라면서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게 되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해서, 사는 고통과 죽는 행복에 대해서, 사는 행복과 죽는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남겨진 자의 슬픔에 대해서. 그닷없이 죽기도 하고 끌고 끌어서도 죽고, 어려서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등등. 죽는다는 게 인간의 상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우친 셈이다. 그러면서 살아남는 문리를 건져 올리기도 했을 터이다.
물론 이런 경험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설령 그 같은 경험이 없다고 해도 죽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죽음의 의미를 일부러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수는 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더구나 내놓고 죽음을 말하는 것은 터부시되어 왔다. 하지만 나는 종종 떠오르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애써 밀어내지는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 나쁘지 않은 성싶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준비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마친 뒤에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여느 할머니들의 말씀처럼 '자는 잠에 갔으면'이 되지 못하고 악전고투를 하게 되더라도 그 시간이 지나면 영면이 온다. 오고야 만다.
영면, 영원한 안식이 온다. 나는 정지되고 소멸된다. 내가 보았던 온갖 아름다운 것, 내가 들었던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무엇보다 살마들의 정겨운 말소리들로부터 내가 떨어져 나간다. 내가 가졌던 유명 무형의 소유물들을 놓쳐버리고 나의 기억마저도 나를 떠난다. 어쩌면 내 영혼은 내가 가졌던 육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없어진다. 그것은 슬픈 일인가. 적어도 나의 슬픔은 아닐 것 같다. 남겨진 사람들의, 결국은 희미해지고 마는 슬픔이 아니겠는가.
언제가 되든 그 시간은 나에게 올 것이고 나는 편안한 잠에 들게 될 것이다. 얼마나 편안할까. 잠을 생각해보면 짐작이 된다. 일생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영면을 마다하고 유전자를 제거해가면서 하염없이 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자연은 곧 섭리인 것을.
나도 모르는 내 속마음이 혹시나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어서 이렇게 사설을 풀어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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