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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생수 두 병 / 최순옥

생수 두 병 / 최순옥




'딩동'
조그맣게 들려오는 벨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같은 층에 사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큰 물병은 안고 양손에 하나씩 비닐통과 유리병을 들고서 말이다.
벨소리를 단번에 듣지 못하고 뒤늦게 야 문을 열게 되어 미안한 얼굴로 받아든 것은, 미처 식지 않았다는 식혜가 가득 담긴 물병이있고, 충남 강경에 갔다가 사 왔다는 새우젓과 조개젓이었다.
"잘해 준 일도 없는데 받기만 해서 어떻게 해요?"
몸둘 바를 몰라 하는 내게,
"깁스한 다리로 10층까지 들고 올라온 물을 주셨지 않아요?"
아주머니는 소리치고 달아나, 나는 그만 너털웃음을 웃고 말았다.
지난해 여름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지하실에 물이 가득 차서 밤사이 정전이 되고 물까지 단수되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어서 온 동네는 깜깜한 채 촛불이나 손전등으로 불을 밝히고, 그나마도 없는 집은 먹 방 그대로였다. 게다가 받아 둔 물도 없어 식수는 물론 화장실에서 쓸 물이 더 급해서 아파트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관리실에서는 물을 퍼내느라 밤새워 작업을 하고, 주민들은 생수로라도 화장실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슈퍼에도 품절이 되었다.
동사무소에서 부랴부랴 출동하여 수도관에 파이프를 연결시켜 놓아 수돗물이 계속 나오고 있어, 주민들은 물통과 물병들을 들고 맨 앞 동 마당에서 물을 받아오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아들집에 갔다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져 깁스를 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물통을 들고 나가는 남편을 따라 생수 병 두 개라도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나가다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웃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수도물이 나온다는데 받아와야지요."
"물이 나오면 무슨 소용인가요? 허리가 아파 들고 오지를 못하는데요."
나는 가슴이 찡했지만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내려가는 계단을 향했다.
평소에는 우리 아파트 앞뒤가 확 트여, 앞으로는 법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줄을 지어 차가 오고 가는 모습을 10층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야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뒤로는 반포대교 아래 한강의 푸른 물이 햇빛에 반짝이며 출렁거리는 모습이 가슴을 시원하게 했는데, 정전으로 엘레베이터 마저 작동되지 않아 물을 받으러 절룩거리며 한 계단씩 내려가고 올라와야 하는 그 당시는, 고층이 결코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물통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남편 뒤에서, 2리터짜리 물병 두 개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한 계단 위에 올려놓고, 목발을 짚으며 한계단씩 올라가기란 정말이지 진땀이 났다.
겨우겨우 10층까지 올라와 보니 그녀는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나는 물병을 들고 차마 그 앞을 지나오기가 마음에 걸려 받아온 수돗물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허리 아픈 디스크 환자에다 발까지 다쳐서 고생하시는데, 어떻게 받겠습니까?"
한사코 사양하는 그녀에게 겨우 물을 건네주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왜 그리 가벼웠는지 모르는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녀는 별미 음식이라도 하는 날엔 맛 좀 보라며 가지고 온다. 나는 또 그 마음이 고마워서 선물이라도 들어오면 나누어 먹는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로 늘어나고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생각난다. 좋은 일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어려운 일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겠지.
황혼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뒤돌아보면, 나는 참으로 인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록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내 주위에는 마음이 깊고 후덕한 분들이 많아 정을 나누며 지금까지 가까이 지내고 있다.
나는 조그만 정성과 따뜻한 마음밖에 준 일이 없는데, 그들은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이제 우리 둘 다 일터에서 물러나 힘없는 노인이 되어 있어도 아직껏 찾아와 주고, 우리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들에게서 받은 사랑은 두고두고 내 가슴속에서 몇 배로 자라나, 내가 이 세상에서 훈훈하게 살아가도록 의지가 되어 주고 있다.
멀리 진해에서 전주까지, 그리고 대전과 이 넓은 서울에서까지 우리는 온통 그들의 성원과 격려로 노후를 외롭지 않게 보내고 있어, 든든하기 그지없다.
남은 소망이 있다면 내 기력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맑고 따뜻한 것을 심어 주어, 우리 보다 더 훤칠한 삶으로 살아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