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집 / 견일영
나는 가끔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꿈을 꾼다.
봉놋방에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으면 세상 소식을 듣게 된다. 3평 좁은 방에서 10여 명이 토해내는 세상사 사연들은 어려웠던 지난날에 위안을 주기도 하고 살아갈 앞날에 용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국밥 한 그릇, 막걸리 한 주발 요기로 하룻밤 방세가 없는 것이 다행이다. 넉넉하지 못한 여비를 머리 속으로 계산하며 방안에 꽉 찬 나그네들의 표정을 훔쳐본다. 모양도 형형색색, 표정도 가지가지,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만물상만큼 다양하다.
그 허름한 행색, 주먹 같은 말투로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벽을 보고 돌아앉은 나그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마음에 익지 않는 방 분위기는 심약한 나를 금세 그리움의 배에 싣고 고향 동네로 데려간다. 뜯게옷 솔기를 따며 바느질로 밤을 지새우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그렇게 이뻐하던 자식들의 얼굴이 달처럼 솟아오른다. 먼 하늘로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그림처럼 붙박힌다. 그리움은 초승달로 돋아 오르고 가슴 속에 만월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세월이 마냥 지겹다. 그렇게 아름답던 달도 소태같은 세월에 바래어 그리운 한으로 비치다가 이내 눈이슬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면 먹구름 속에서 탈출하려고 용을 쓴다. 내가 쉬어갈 주막집은 피곤하고 괴로울 때 제 자리에서 기다리겠는가. 그리고 그 퀴퀴한 봉놋방에서 뭇사람들과 함께 자며 위안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어느 시인은 황천으로 가는 길에 쉬어갈 주막 걱정을 했는데 저승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막막했으면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했겠는가. 살아있는 지금도 마음 놓고 쉬어갈 주막이 없는데 그 멀고 험한 황천길에는 무슨 주막이 있겠는가. 정녕 쉬어갈 곳이 없으면 노숙이라도 해야지. 등행에는 비브왁이라는 노숙 방법이 있다고 하나 맨몸으로 가는 나그네는 바위 밑에 끼어 자는 수 밖에 없다. 비록 비브왁으로 비나 이슬을 피할 수는 있어도 외로움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으리라. 저승차사는 왜 한 사람씩 데려 가는가. 먼저 외로움으로 인간을 길들여 놓으려 하는가. 뜬 인생은 분수가 정해져 있어 배고프고 배부름을 피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그보다 외로움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비극이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철도국에 다나셨다. 집에는 철도 관련 책들이 많아 호기심으로 그것을 많이 보았는데 거기서 아주 인상적인 대목을 발견했다. '열차는 출발과 동시에 정지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제동장치를 철저히 정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 '기차의 가장 큰 장점은 빨리 달리고 멀리 가는 것인데 정지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 후 출발선에 선 열차가 검차원으로부터 조그만 망치로 얻어맞으며 점검받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차바퀴를 제어하는 에어 브레이크를 시험해 보며 기관사와 수신호로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살아가면서 막무가내로 달릴 줄만 알았지 때때로 생각하는 시간도 가지고 쉬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정지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처음 출발할 때부터 쉬어가고 정지하고 하는 지혜를 터득했더라면 내가 걸어온 삶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는지 모른다.
정녕 인생은고행인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신의 그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쉴 곳을 찾아 헤메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슬픈 일인가.
주막집 마당에 살평상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에 만족해야 하는 나그네가 허황한 꿈으로 육신만을 고달프게 했으니 참으로 어리석고 못난 여정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주막에서 뒤돌아보는 과거는 아름답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그려보는 고향의 수채화는 더없이 아름답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웃으며 말했던 '저는 조금도 고생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는 거짓말이 가장 이 세상을 아름답게 묘사한 명언이 될 줄이야.
주막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다. 정처 없는 길손들이 모여든다. 잘난 사람도 외로움을 제 모가치로 챙기고 여기서 쉬어가야 한다. 아, 그러나 내가 머물러야 할 주막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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