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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여백 / 김시헌

여백 / 김시헌

 




여백은 남아 있는 면적이다.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여유스러운 지역이다. 텅 빈 느낌을 주는 한가한 곳이다. 넉넉하고 넓고 크지만 쓸모가 별로 없다. 그러면서 여백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
나의 집 앞에는 작은 개울이 하나 있다. 너비 20미터가 됨직한 완곡선의 길쭉한 개울이다. 물이 마르기 시작한지 3년째란다. 처음 이곳으로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개울이 이사의 중요한 조건으로 꼽혔다. 그곳에 장차 물이 넘치면 큰 강물의 고기가 거슬러 올라올 것이라고 상상도 했다.
이사 후 며칠 뒤에 나는 상류 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시오리쯤 간 곳에 높은 산이 있었다. 수리산이라 했다. 개울의 근원은 그 산에 있었다. 올라갈수록 물의 양이 많아졌다. 오염될 조건이 아무 것도 없어서인지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은 완전히 말라붙어 버렸다. 1년이 넘도록 바닥을 내놓고 있다. 큰비가 오면 소리를 내면서 야단스럽게 물이 흐르지만 한 달이 못 가서 또 바닥을 드러낸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콘크리트 다리 위에 서서 말라붙은 개울의 바닥을 바라본다. 자갈과 모래와 큰 돌들이 알몸을 드러내놓고 있다. 위쪽을 바라보기도 하고 아래쪽을 내려가 보기도 하면서 구경을 하고 있으면 지구의 창자가 드러난 것 같다. 하늘을 보면서 개울은 말이 없다. 기가 찬 모양이다. 무엇을 놓치고 잃어버린 표정이다. 언젠가는 다시 물이 흘러 개울을 채워 주리라는 희망은 있다. 그러나 나라 안의 여기저기에서 저수지가 마른다 하고 식수가 모자란다고 야단이다. 나는 말라붙은 개울을 볼 때마다 그것을 여백으로 느낀다. 할 일도 없고, 표정도 없고, 버려진 땅으로 비어 있기 때문이다.

허공은 우주의 여백이다. 별과 달, 달과 해, 지구와 구름 사이가 모두 텅 비어 있다. 그 허공에 때때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큰 물고기나 독수리같이 유유히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개를 펴고 흐르듯이 간다. 허공이 없었다면 비행기는 하릴 없는 존재가 된다. 공간이 없는데 어디에다 날개를 펴랴.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산비둘기인지 집비둘기인지 구별이 어려운 새가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때때로 아파트의 둘레를 빙빙 돈다. 그 날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마음의 여백을 느낀다. 비둘기는 땅에 앉아서 먹을 것만 찾는 것 같아서 때로 밉기도 했는데 그들에게는 낭만이 있는 모양이다. 20층의 꼭대기를 놀이터로 삼고 대여섯 마리씩 무리를 지어 돌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넓어진다. 세상은 이것과 저것이 한데 어울려 커다란 조화를 만든다. 그 자리에는 대개가 작고 큰 여백이 한몫 낀다. 여백은 여유의 생산자이다. 한가한 면적을 만들어서 더 넓은 공백을 창조한다.

 


노년은 인생의 여백이다. 하던 일을 다 놓아 버리고 머리에 흰 눈을 인 채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다닌다.
손도 비고 마음도 비고 몸도 비었다. 비어야 떠나기가 쉽다. 가벼워야 날기가 좋다.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은 날아야 어디론가 간다. 그리하여 인생의 끝을 눈앞에 두고 초조하지 않다. 속에는 아직 덜 꺼진 불씨가 있을지 모르지만 겉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살이 빠지고 기운이 없고 다리가 휘청거리지만 표정은 언제나 표백된 맑은 빛이다. 어느 날 후루룩 자기 자리를 떠난다 해도 미련이 없다. 그러한 미련 따위는 세월 속에서 이미 하나 둘씩 놓아 버렸다.

인생의 여백! 그것에도 낭만이 있다.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허허한 낭만이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사후에 대한 막연한 기대이다. 인생을 고되고 지루하게 치른 사람은 다음에는 새나 나무가 되기를 원할지 모르고 인생을 값지게 소중하게 치른 사람은 다음에도 또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대할지 모른다.

 


지하철은 대부분 땅 속에 깔려 있다. 그러다가 지상으로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가 확 열린다. 먼 곳에 산과 하늘이 보이고 들녘에 푸른 초원이 나타나기도 하고 철길 아래에 다닥다닥한 도시의 집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고층 건물이 우뚝우뚝 서서 시위를 한다.
그런데도 그 전체가 나에게는 여백 속의 물체로 관망이 된다. 왜 그런 것일까. 여백이란 비교의식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좁은 데서 넓은 데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빽빽한 것에서 헐렁한 것에로, 긴장에서 해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여백을 느낀다. 그리하여 커다란 풍경화를 만들어 놓는다. 여백 지역에 있는 물체는 공짜로 얻는 거대한 예술품이다. 서양화가 아니고 동양화라고 할까.
그 다닥다닥한 집 속에는 따스한 평화도 있지만 물고 뜯는 싸움도 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긴장의 연속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에는 잠시 눈감고 싶다. 너무 따지면 여백을 잃는다. 그냥 그대로 여백만을 즐기고 싶다.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속에도 여백은 있다. 가슴 안에 있는 여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없는 듯이 숨어서 세상을 본다. 10평도 못 되는 작은 집에 살아도 50평, 100평의 마음을 가진다. 봄,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추이도 본다. 그 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이 곧 자기 자신임을 깨닫기도 한다. 마음의 여백은 무한대이다. 우주가 들어간다 해도 여백은 남는다. 그렇게 볼 때 여백은 그 것에 있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