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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푸른 자전거 / 최민자

푸른 자전거 / 최민자

 

 

 

지난 한 해 동안, 여러 명의 지인들을 떠나보냈다. 예고도 없이, 순서도 없이. 이런 저런 가면을 쓰고 나타난 복병들은 진즉부터 뒤를 밟고 있었다는 듯이, 어느 날 문득 음험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웃었다. 아무도 비켜갈 수 없는 승률 제로의 게임. 자연이 오빠도 그렇게 갔다.

흰 국화송이에 에워싸여 쓸쓸히 웃고 있는 오빠의 얼굴을 만나는 순간, 천둥같은 후회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만났어야 했는데. 만나서 마지막 작별의 인사라도 건넸어야 했는데. 살아서 손 잡아주지 못한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통한의 예(禮)를 올렸다. 이날이 올 줄 알았으면서, 왜 나는 한사코 외면하려 했을까. 왜 나는 번번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뒤에서 뼈아픈 참회를 하는 것일까.

자연이 오빠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을 나는 지금도 선연하게 기억한다. 창백한 낯빛으로 대문간에 서서 ‘엄마 아침에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하던, 도장밥이 듬성듬성한 머리에 다부진 눈빛의 열두 살 소년은 울지도 않고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돌아섰다. 부음을 듣던 순간 단박 그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고모부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고모마저 세상을 떠난 후, 오빠는 그렇게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우리 집에 온 후로 오빠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다. 후에 엄마는 그 사실에 대해 매우 미안해 하셨지만, 일곱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만으로도 당시로는 힘에 부치셨을 것이다. 잘 나가던 시내의 세탁비누공장이 부도가 나, 변두리로 물러 앉아 소규모의 가내공장을 꾸려가던 때였다. 공장에는 그 또래의 더벅머리 소년들과, 밑천이 없어 장가를 들지 못한 노총각 일꾼들이 여러 명 있었다. 밥숟가락 하나 더는 것만으로도 큰 부조였던 시절이어서 월급은 고사하고 밥이나 실컷 먹여주면 좋겠다며 코 안 뚫은 송아지 같은 아들들을 데려와 짐 부리듯 부려놓고 돌아서는 시골아낙들이 줄을 잇던 때였다.

성격이 밝고 명민한 편이었던 오빠는 이런저런 심부름도 하고 공장일도 배우며 그런대로 무리들과 잘 섞여 지냈다. 오빠가 안채에 들어와 우리들과 어울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나는 오빠에게 알 수 없는 연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음에도, 등굣길이 멀어 오빠의 자전거를 많이 얻어 타고 다녔음에도, 함께 살았던 십여 년 동안 오빠라고 불러본 적조차 없었다. 부끄럼 많고 암띤 성격에 사춘기 즈음이어서 내외를 심하게 했을 것이다.

“다릿목 까지만 태워다 주고 오렴.”

아침마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가방 들고 학교에 다닐 나이에 막일이나 하고있는 조카가 안쓰러워, 자연이 오빠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늘 낮게 잦아들었다. 비누가루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면장갑을 작업복에 탈탈 두드려 털고서, 오빠는 말없이 자전거를 대령했다. 시내버스가 있기는 했지만 종점에서부터 만원이 되어 오는 바람에, 시내 쪽에 가까운 우리 동네는 서지도 않고 지나치기가 일쑤였다. 걸어가자면 한 시간은 넉넉히 걸리는 거리여서 늦는 날에는 으레 자전거 신세를 져야 했지만 더벅머리 오빠가 자전거로 데려다주는 등굣길이 나에게는 썩 달갑지 않았다. 털털거리는 짐 자전거와 허름한 셔츠에 들러붙은 비누쪼가리와 바퀴를 굴릴 때마다 볼가지는 울룩불룩한 장딴지가 싫었다. 등교하는 학생들 사이로 사촌여동생을 실어 날라야 하는 오빠의 서글픔은 헤아리지 못한 채, 내 부끄럼만 생각하였다.

열일곱 소년이 열네 살 소녀를 자전거 짐칸에 태우고 달린다. 하얀 교복칼라의 갈래머리 소녀는 소년의 등에 닿지 않으려고 책가방을 가슴팍에 꽉 껴안는다. 소년의 자전거가 비포장 신작로 길을 달린다. 갈래머리가 출렁댄다. 자전거 바퀴 아래 밀려나는 자갈들이 어린 개구리처럼 종알대며 비켜난다. 핸들을 잡은 소년의 팔뚝에 핏줄이 파랗게 돋아난다. 또래에 비해 키가 작은 소년이 먼지 나는 오르막길을 내달리려면 반쯤은 선 자세가 되어야 한다. 안장 높이 엉덩이를 세우고 허벅지 근육을 둥글게 움직이며 폐달을 밟아가는 소년의 날숨에 휘파람 소리가 묻어난다. 내리막길에 들어설 즈음 소년의 잔등은 가파르게 휘어진다. 가속도가 붙어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자전거가 겁나서, 펄럭거리는 점퍼자락을 소녀는 살짝 당겨 잡는다. 오빠는 언제나 학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나를 내려주고 돌아서 갔다. 미안하다고도, 고맙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멀어지는 오빠의 점퍼자락이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보였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 집 사업도 몇 번의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공장식구들도 제각기 흩어졌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오빠가 집안 좋고 인물 좋은 내 여고 선배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는 일이 바빠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간간히 전해 듣는 오빠의 건재함은 내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내가 진 빚을 누군가 대신 갚아주고 있는 듯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다시 오빠를 만난 것은 몇 년 전 친지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의지가 강하고 부지런한 오빠는 이런저런 고생 끝에 자리를 잡아 그런대로 여유롭게 늙어가고 있었다.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지혜로웠고, 사는 일의 고달픔을 넉넉한 웃음으로 삭일 줄도 알았다. 오빠도 나도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할만한 세월의 굽이에 접어들어 있어서였는지 우리는 곧바로 의기투합되었다. 민감한 사춘기를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추억할 일들이 많은 법이다. 더군다나 삼십년도 넘는 간극이 윤색시켜 둔 시간의 켜를 뒤적거려보는 일은 거치기간이 긴 적금을 타먹는 것처럼 이자가 수월찮이 불어 있기 마련이다. 집안일하는 처녀와 정분이 나서 내 작은 오빠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던 이야기며, 재치 있는 농담으로 공장식구들을 웃겨주던 상옥이 아저씨 이야기며, 쥐약을 잘 못 먹고 죽은 우리집 강아지 이야기까지, 사는 일에 끄달려 보이지 않는 시간의 주름 사이로 숨어들고 싶어질 때마다, 전화통을 붙잡고 앉아 빛바랜 추억의 통장을 꺼내들곤 했다. 세상풍파에 모서리가 깎여나간 오빠가 부드럽고 낙천적인 어른이 되어 있는 게 대견했던 것처럼, 오빠 또한 붙임성 없고 혼자 놀기 좋아하던 동생이 세상 속에 섞여 그런대로 살아내고 있는 것 같아 속으로는 적이 흐뭇했을 것이다.

“너하고 이야기할 때가 제일 맘이 편해야.”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에 대하여 그가 왜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상흔은 상처를 목도한 사람만이 위로할 수 있는 법이니까.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에게서는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유년의 상처를 다 보상받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기억이란 시간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장소일지 모른다. 무자비한 시간에게 발각당하지 않고, 그 급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후미진 강가 어디쯤에 퇴적된 결 고운 모래톱 같은 것. 아니면 시간의 외줄기에 드물게 열매 맺는 아릿하고 달보드레한 나무딸기 같은 것. 그것이 기억의 실상일지 모른다.

 

‘맘이 없어서가 아니었어요.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서였어요. 포승줄을 쥔 복병의 횡포를 용납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건널 수 없는 강안(江岸)에 서서 나는 뒤늦게 변명하였다. 왜 나는 이때까지, 이런 내 심정을 오빠가 알아주리라 믿었던 것일까.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어느 날 갑자기 발병 소식을 듣고, 수술 후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오빠는 내게 걱정 말라며 웃었다. 몸무게가 반으로 줄고 얼굴빛이 폐허처럼 어두워가면서도,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빨리 나아 어디 가서 맛있는 밥 먹자고, 나도 흔연스레 응수를 했다.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단호하게 발길을 끊었다. 첨예하게 안테나를 세우고 소식을 듣고 있으면서도 몇 달 동안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매정한 절교였다. 비겁한 회피였다.

어렸을 때, 아마도 네 살인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내 엄지손가락이 문틈에 끼인 적이 있었다. 엄마와 큰언니의 증언에 의하면 피가 난 엄지손톱을 주먹 안에 감추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잠을 잘 때에도 주먹 쥔 손가락을 절대로 펴지 않아 약을 바를 수가 없었다는데, 피멍든 손톱이 빠지고 다시 날 때까지 몇 달을 그렇게 감추고 다녔다는 것이다. 피 흘리는 상처를,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을 들여다보고 대응하는 대신 외면하고 도망쳐 다니면서 살아온, 돌이켜보면 나는 늘 도망자였다. 월드컵 한일전을 할 때에도 숨 막히는 경기장면을 볼 수 없어서 아무도 없는 아파트 동 사이를 혼자서 이리저리 서성이고 다녔다. 사냥꾼에 쫓겨 다급해지면 몸을 피하는 대신 머리만 풀숲에 박고 할딱이는 까투리처럼, 미련스럽고 겁 많은 도망자가 나였다.

더 이상 오빠를 찾지 않게 되고부터 이상하게 선명해지는 기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쯤이던가. 여름방학 동안에 퇴비 한 짐씩을 해 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도시 복판의 학교에 왜 퇴비가 필요했었는지를 지금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뒤꼍 화단을 가꾸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자매결연한 농촌마을을 돕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방학동안에 말려둔 풀 더미를 한 단씩 가져다 부려 놓았다. 선생님은 퇴비를 안 해 온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누구에게도 풀 베는 일을 부탁하지 못한 나는 결국 집으로 쫓겨 갔던 것 같다. 어떻게, 누구에게 이야기를 꺼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점심시간, 운동장 한 구석, 회화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였다. 교문 근처에 푸른 풀 한 짐이 가득 실린 자전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자연이 오빠였다. 교문에 선 오빠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처럼 불안스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자전거 짐칸에는 부드럽게 마른 건초더미가 아닌, 소에게나 주면 맛있게 먹어치울 억센 여름풀들이 산만큼이나 높다랗게 실려 있었다. 나는 오빠가 찾고 있는 게 나라는 것을 당연히 알아차렸지만, 오래된 회화나무 뒤 담벼락 아래로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오빠의 자전거는 여름 한낮의 운동장 구석에 한동안 그렇게 비켜 서 있었다. 전교생이 삼천 명이 넘는 학교에서, 오빠는 내가 오학년 몇 반인지조차 알아내지 못한 채, 무거운 자전거를 뒤뚱거리며 교문 밖을 돌아 나갔을 것이다.

영화가 한 장면의 예술이라 하듯, 사람의 일생도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 건지 모른다. 프랑크 시나트라가 떠난 뒤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불던 트럼펫 소리가 오래오래 가슴을 적시는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와 같이, 떠나간 사람의 어떤 모습은 시간이 흘러도 풍화되지 않는다. 새벽하늘에 걸린 그믐달처럼, 슬픔의 흰 뼈처럼 가슴에 남아 남겨진 자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산다는 것은 거기까지가 아닐까. 마지막에 들이킨 숨을 내뱉지 못할 때까지가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아주 지워져 버리게 될 때, 그 때 완벽하게 소멸되는 게 아닐까. 나무 위에서 한번, 땅 위에서 또 한번 피어나는 저 동백꽃처럼, 사람의 혼백도 그렇게 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 한 번 더 환하게 타올랐다가 시나브로 사위어 가는 건지도 모른다.

따뜻한 찌게냄비에 찬 술 한잔 건네며 내 못난 어린 날을 사과할 기회는 이제 영영 사라져버렸다. 함께 나눈 말들과, 웃음소리와, 헛된 후회의 눈물도 무화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날, 쇠뜨기며 칡넝쿨을 너울거리며 떠들썩한 아이들 틈바구니에 망연히 서 있던 오빠의 자전거는 지워지지 않는 비문이 되어, 새로이 돋아난 별자리가 되어, 내 마음 속 중천에 푸르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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