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꽃물을 들이며 / 정성화

꽃물을 들이며 / 정성화

 



내 손톱에는 다홍빛 반달이 걸려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반달보다 작기는 하지만 내 마음에 오롯이 들어차는 반달이다. 내게 오래 머물러 달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보지만, 그 반달은 내게 욕심 비우는 법을 가르쳐주기라도 하듯, 매일 조금씩 자신을 덜어내고 있다.

지독한 여름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만드는 더위가 사람의 몸을 엿가락처럼 늘어지게 했다, 뚝 끊어지는 것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런 어느 날, 소포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봉숭아 꽃잎과 초록 잎새가 가득 들어 있다. 산골의 시원하고 맑은 바람까지 함께 넣어 보낸다는 편지도 들어있었다. 이 미욱한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K선생님의 사랑이었다. 저간의 사연에 감동을 받아서였는지 동봉한 편지 또한 촉촉이 젖어있었다.


소설가 ‘김동리’는 꽃을 볼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고 하며, 그것은 꽃에서 신의 얼굴을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고결한 영혼을 본다는 뜻일 것이다. 고결한 영혼은 다른 영혼을 순하고 착하게 정화(淨化)시켜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온을 소진해서라도 다른 영혼을 끌어올려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신의 얼굴에 경배(敬拜)를 올렸다. 손톱보다 내 마음에 먼저 꽃물이 배여 오는 듯 했다.

 

산 넘고 물을 건너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 봉숭아 꽃잎은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그 산골의 투명한 햇살과 청량한 바람, 아무 걱정 없이 흐르는 새털구름, 그리고 마당가에서 졸고 있는 분꽃의 모습을 기억하며 오느라고 한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소포를 펼쳐든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주기 위해 촉촉한 눈망울을 굴리며 왔을 듯싶었다. 신(神)은 인간의 말이 너무 어눌하다는 느낌이 들어 또 하나의 언어로서 꽃을 피운 게 아닐까.

봉숭아 꽃물을 들이며 나는 전통 혼례를 상상했다. 늦은 밤, 손톱 위에 봉숭아 꽃잎 찧은 것을 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하얀 나의 손톱도 처음에는 움찔 놀라는 듯 했으나 다소곳이 꽃을 받아들였다. 그 위에 봉숭아 잎새를 덮어주고 몇 겹 감싸주면서, 나는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어미의 마음이 되었다. 그저 오늘 밤 잘 자고 내일이면 아름다운 꽃물이 들어있기를 바란다고 일러주었다. 비끌어지지 않도록 무명실로 칭칭 동여맬 때는 친정아비의 마음이 되어 중얼거렸다. ‘사는 게 별 거여. 그저 서로를 이쁘게 물들여가면서 살면 그걸루 되는 거이여.“ 밤새 나는 몇 번이고 뒤척였다. 꽃물이 드느라고 그런지 손끝이 아릿했다.

아침에 맨 먼저 본 것은 붉게 물이 든 무명실이었다. 밤새 신방(新房)을 지켜주느라고 얼마나 용을 썼던지 하얀 무명실은 온통 붉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가만가만 실을 풀었다. 내 손톱은 ‘열아홉 살 섬색시’와도 같이 아주 화사한 다홍빛을 띠고 있었다. 손톱을 보고 있으니, 내 자신이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할 준비가 다 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손톱에 든 꽃물을 보며 나는 그때도 다른 꽃물들이기를 생각했다. 내가 정말 닮고 싶은 K선생님의 모습을 한 조각 두 조각 얻어올 수만 있다면, 내 마음에 덧댄 다음 새하얀 무명실로 칭칭 감아두고 싶었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려보리라 생각했다. 어느 날 문득 내게 조금씩 배여 오는 꽃물, 그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내가 봉숭아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수필가 M선생님은 생전에 가곡 ‘봉선화’를 좋아하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어는 후학(後學)이 그 분의 빈소에서 밤새 이 노래를 하모니카 연주로 고인께 들려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봉숭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릿해지면서 그리움이 번져온다. 그 분의 맑은 모습이 그립고, 다정한 말씀이 그리워지며, 이제는 천상(天上)의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는 그분의 신작(新作) 수필이 그립다. 삶의 진정한 부가가치가 무엇인지 글로서 충분히 보여주었던 그 분을 생각하며, 내 손톱에 반만 남은 봉숭아 꽃물을 들여다본다.

언뜻 보니 빨간 우체통처럼 보인다. 선생님이 천상(天上)에서 보낸 편지가 들어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선생님은 내게, 봉숭아 꽃물이 다 사라지기 전에 봉숭아꽃처럼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글을 한번 써보라고 편지에 적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수필을 온몸으로 사랑하셨던 M선생님을 생각하면, 봉숭아 꽃물이 든 이 손으로는 왠지 착한 일, 사람을 아끼는 일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울밑에 선 봉숭아처럼 소박하게 살다 가셨지만, 선생님은 당신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운 꽃물을 들여놓고 가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받잡아 책상에 앉아보지만, 나는 그 분의 신작(新作)이 보고 싶어 자꾸 내 손톱의 우체통만 열어보고 있다.

 

봉숭아는 내게 그리움의 빛이란 어떤 것인지, 가슴에 꽃물은 어떻게 들이는 것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다홍빛 반달 속에서 오늘도 나는 두 분 선생님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