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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신용카드 / 염정임

신용카드 / 염정임

 

 

 

빚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옛말에도 ' 빚진 종' 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기 시작한 신용카드란 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며 살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였으니 부자들이 되었으련만 어찌하여 빚진 자로소 살게 되었는지... .

염치와 예의를 숭상하던 우리의 조상들은 빚을 지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는데 요즈음의 우리들은 그것을 보통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신용카드가 무슨 신분의 상징처럼 인식되어 권위 있는 사람일수록 많은 종류의 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신용 카드가 없으면 현대인의 대열에 못 끼이기라도 하는 듯 카드 가입자는 날로 늘어간다고 한다.

가구나 의복에서부터 음식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던지 돈도 내지 않고 먼저 입고 먹고 마시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과 향락의 노예가 되는 게 아닐까. 나도 어쩌다가 한 두개의 신용카드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카드로 인해 자연히 씀씀이도 헤퍼지거니와, 만약 잃어버려서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것을 간수하는 데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이다.

핸드백 속, 깊숙이 간직하고도 없어진 줄 알고 가슴이 덜컹 내려 앉은 게 벌써 몇 번이었는지.... . 정말 그 때는 나의 ' 신용' 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처럼 당황했었다. 물건을 산 후에 카드를 주면 점원은 조그만 기계에다 카드를 집어넣고 종이에다 대고 꾹 누른다. 그러면 숫자와 함께 내 이름이 시퍼렇게 박혀나오는 것을 보면 섬득한 기분이 된다.

옛날에 노예의 등에 화인을 새겼듯이 내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마치 내가 물신의 노예라도 된 듯 떨더름해지는 것이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 얇다란 카드는 어쩌면 ' 노예증' 인지도 모른다. 물질과 상흔의 노예.... . 카드를 가진 이 후 나는우울한 월말을 맞이하고 있다. 월말이면 날아들어오는 각종 청구서가 나를 얽매이게 하기 때문이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무엇이건 원하는 것은 우리 손에 쥐어주던 환상의 카드가, 월말이 되면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요구하던 냉혹한 샤일록으로 변하고 만다. 그래서 한 달의 마지막을 한숨으로 마감하게 된 것이다. 카드를 사용하게 될 때마다 나는 자신이 ' 장자' 에 나오는 어리석은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일 때가 많다.

점원은 언제나 상냥하게 " 월부예요, 일시불이예요?" 하고 묻는다. 그것은 마치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 도토리를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줄까? 아니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 줄까?" 하고 묻은 것 같이 들린다. 아침에 도토리 넷을 받기를 원한 그 원숭이들처럼 나도 " 월부요" 하고는 덤이라도 얻은 듯 만족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내가 낼 몫인데 나누어서 내는 게 아름답고 착각하는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언제나 뒤따르게 마련이다.

요즈음에는 나날이 새로운 물건이 선보이고, 들리는 것이나 보이는 것은 모두 아름답고 편리하다는 상품의 선전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문화와 품위 또는 세련됨을 내세우며 소비를 부추긴다. 아무래도 지금은 이웃 나라의 교훈에 나오는 세마리 어리석은 원숭이처럼 차리리 눈도 가리고, 귀 입도 가리고 살아야 될 것 같다.

요즈음 말썽을 빚고 있는 지나친 소비와 사치풍조의 원인 중에는 신용 카드도 한몫 거들고 있으리라. 아무래도 요즈음의 우리는 ' 신용' 을 너무 남발하지나 않나 하는 마음이 든다. 과연 우리의 신용은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일까. 누군가 말했듯이 사람들이 소유한 재산이란 자기 집 마당에 내려앉은 새와 같아서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욱신일까. 앞으로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갈 육신이나 건망증 심한 기억력과 얄팍한 지식은 더욱 믿을 게 못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신용은 따듯한 마음씨, 남에 대한 배려와 풍부한 인간성, 그리고 무엇보다 순결한 영혼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되는 것이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신용을 담보로 빚을 지고 살아가는 있으니, 지금쯤 나의 신용을 한번 점검해 봐야 되지 않을까.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빚을 지며 살아간다. 한 순간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게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의식주에서부터 보는 것, 듣는 것에 이르기까지... . 우리가 지고 있는 사랑의 빚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진정 갚아야 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청구서가 아닐까. 아무 답보도 없이 누리는 생명의 무한한 환희! 일상이 주는 잔잔한 기쁨!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삶이 거두어 질 때 내 몸 청구서에는 얼마나 많은 빚이 남아 있을까.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