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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가을 편지 / 고임순

가을 편지/ 고임순



 


맑게 개인 드높은 하늘 아래 이 땅의 온 산야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어 지금은 가을이 한창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어머님께서 생전에 즐겨 앉아 계시던 목련나무 밑에 눈길이 머뭅니다. 나도 오늘 그곳에 나와 앉아 조용히 어머니를 불러봅니다. 눈앞이 훤하게 밝아오는군요.
내 생명의 뿌리이신 어머니.
어머니께서 공들여 가꾸어 주신 ‘나’라는 나무는 이제 가지마다 휘어져 무성한 잎새들이 어쩔 수 없이 단풍이 들어버렸군요. 살아갈수록 왜 그리 힘들고 가슴은 답답한지, 오늘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을 비우고 싶습니다.
어머니.
내가 시집가던 날, 내가 입은 웨딩드레스가 학의 날개 같다고 하시며 너무나 새하얗고 눈부셔 눈물을 삼키셨다는 어머니. 어린 자식 물가에 내보내듯 “몸조심하고 제발 성미 죽이고 참고 살아야 한다, 여자이니까.”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시던 어머니. 그 말씀 속에는 훨훨 날 수 있는 딸의 날개를 접어버린 아쉬움이 고뇌로 이어져 여자의 길을 가는 딸에 대한 연민의 정이 스며져 있었지요.
그때 어머니 눈물의 뜻을 나는 살아가면서 터득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그 많은 일에 잠시 쉼표를 찍고, 나는 용사처럼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이기며 세 아이를 낳고 키울 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서투른 딸의 살림을 돕기 위해 자주 찾아오셔서 어머니는 말없이 사랑의 실천을 해 주셨지요. 가진 것은 두 손밖에 없다시며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해 주시며 나에게 먹을 가는 시간을 제공해 주신 그 넓은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불혹의 고개에서 갈등하던 나를 일깨워주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자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
어머니의 혼이 담긴 이 말씀은 오늘까지 내 삶을 이끌어준 활력소였습니다.
그때, 인생 중반기에서 회의에 빠져 버린 나는 나 자신을 자각하는 고뇌로 가득했지요. 그때부터 나 자신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이어졌습니다. 인간에게 갈등이 없다는 것은 자아상실이 아닌가요. 갈등을 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므로 나는 이 갈등 앞에서 과감히 맞서 싸웠습니다.
어머니.
80 고개를 바라보시는 성성한 백발로, 이 나무 그늘에 쉬시며 낙엽을 줍던 어머니 모습을 그려 봅니다. “너도 금방 늙는다. 살아서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한만 남는다.”고 하시며, 노안경 너머 눈물을 닦으시던 어머니의 주름투성이의 손등이 눈에 선합니다. 굽은 등을 펴시며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 모으시고 자질구레한 일도 도와 주시던 그 크신 사랑이 지금 뼛속으로 스며드는군요.
나도 지금 낙엽을 주우며 내가 받은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나를 되새겨 봅니다.

어머니.
유치원에 데리고 다니시던 당신의 첫 손녀도 이제 시집을 가서 벌써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결혼식 날 백합꽃같이 곱디 고운 웨딩드레스를 차려 입은 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어머니처럼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가슴 한복판이 무너져내린 듯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하여 아내, 며느리, 어머니, 할머니로 살아가는 여자의 길. 여자만이 겪는 진통의 아픔을 공유하고 감당해야 하는 모녀의 운명은 고귀하기 때문에 한없이 슬프기만 하는 것일까요. 여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눈물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데, 딸은 또 첫 딸을 낳았습니다.
어머니.
여자의 일생 가운데 불혹의 고개는 무엇입니까. 어떤 전환점일까요. 지금 그 고개를 넘으려는 딸은 열린 세계를 향해 새 삶을 창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여자의 삶은 끊임없는 전투이므로 때로는 과감하게 싸우기도 해야 하는 각오가 필요함을 지금 절실히 느낍니다.
어머니.
우리 여자의 승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살아갈수록 회의에 빠집니다. 여자로서 인격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힐 때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어떤 배신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삶은 전투의 계속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람이 붑니다. 나뭇가지에 남은 잎새들이 우수수 비처럼 떨어지는군요. 오늘은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쌀쌀합니다. 그런데 가슴 언저리는 왜 이렇게 훈훈하게 젖어옵니까. 위로 회상할 수 있는 어머니가 계시고, 아래로 딸이 건재하고 있다는 행복감에 나는 마냥 가슴이 뿌듯합니다.
어머니와 나와 딸과의 삼위일체. 언젠가 나는 이 중간 지점을 딸에게 물려줄 날이 오겠지요. 그날까지 나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만큼을 딸에게 몽땅 쏟아 부으려고 합니다.
어머니.
이제 일어나 저녁밥을 지어야겠습니다. 오늘 밤 꿈속에서 만나 뵙고 못다한 이야기 털어놓고 싶군요. 지금 내가 감당해야 할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 따뜻한 품속에 파묻혀 위로받고 싶습니다.
어머니.
오늘은 이만 붓을 놓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