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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다시 듣고싶은 호랑이의 꾸중 / 김 학

다시 듣고싶은 호랑이의 꾸중 / 김 학

 

 



  긴 장마철 내내 방구석에 갇혀 책과 함께 시간을 죽였다. 책과 나는 시간을 죽인 공범이다. 영원한 고전이라는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을 다시 읽었다. 호랑이가 사람을 꾸짖는다는 내용의 고전소설이다. 이솝우화 못지 않게 재미가 있었다. 연암은 어쩌면 그렇게 호랑이에 대해서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을까? 혼자 그 <호질>을 읽으면서 때로는 얼굴을 붉히고, 때로는 소리내어 웃었다. 짧은 글 속에 그렇게 깊은 뜻을 담다니, 연암의 글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이란 고을에는 수천 권의 책을 펴낸 덕망 높은 40대 선비 북곽 선생이 살았고, 그 근처에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수절하던 동리자라는 미인이 있었다. 왕은 일찍이 두 남녀의 명성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열녀에게는 주변의 땅을 주면서 '동리과부의 마을'이란 이름까지 하사하였다.
 그런데 그 열녀 동리자는 저마다 성이 다른 아들 5형제를 두고 있었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날 밤 어머니 침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5형제가 슬금슬금 가보니 어머니가 덕망 높은 선비 북곽 선생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북곽 선생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5형제는, 천년 묵은 여우가 북곽 선생의 탈을 쓰고 어머니 침실에 들어간 것으로 판단하고, 일시에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천년 묵은 저 여우를 잡아라!"라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북곽 선생은 혼비백산하여 여우 흉내를 내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줄행랑을 치다가 그만 거름통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북곽 선생이 가까스로 기어 나오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에 턱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서부터 덕망 높은 북곽 선생에게 가차없는 호랑이의 꾸중은 시작된다.


 "호랑이 님의 높은 덕망은 만인이 우러러보고 그 명성은 성스러운 용과 짝이 되어 '용호'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사옵니다."라고 아첨을 하며 북곽 선생이 머리를 조아리자 호랑이의 질타가 쏟아진다. "유학자는 아첨을 잘 한다더니 과연 옳은 말이로구나."하며 양반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비아냥거린 호랑이는 먹을 것 때문에 다투고 송사를 일으키는 인간의 행위를 가차없이 꾸짖는다. 또 사람은 메뚜기의 양식인 벼나, 누에의 살림살이인 고치, 벌의 양식인 꿀까지 송두리째 털어 가는 도둑놈들이라고 나무라며, 호랑이가 잡아먹는 노루나 사슴, 말이나 소보다 사람이 잡아먹는 수효가 더 많지 않느냐고 힐난한다.


 호랑이는 발톱이나 이빨만으로 능히 위엄을 보이는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니 어찌 그리 간사하고 혹독한 짓만 골라 하느냐고 눈을 부릅뜨며 나무란다. 호랑이는 이렇게 북곽 선생을 신랄하게 꾸짖고서 어슬렁어슬렁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야단을 맞은 북곽 선생은 엎드려 두 번 절하고, "모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악한자라도 목욕재계하면 상제도 섬길 수 있다고 하니, 소신도 목욕재계하고 호랑이 님을 섬기게 하여주십시오."라고 애걸복걸했다. 아무 대답이 없어 간신히 고개를 들어보니 호랑이는 이미 사라지고 동녘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일찌감치 밭에 나온 농부가 왜 새벽부터 들판에다 절을 하느냐고 묻자 유식한 북곽 선생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


 "허허! 자네는 무식하여 모르겠지만, 옛글에 '하늘이 높으니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땅이 넓으니 구부려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있네, 나는 이것을 실천해본 것뿐일세."하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연암 박지원이 2백여 년 전에 쓴 이 소설이 지금 읽어도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리자의 아들 5형제가 모두 성이 다르다는 것은 아비가 모두 다르다는 의미일 테고, 동리자라는 과부가 낮에는 열녀행세를 하고 밤에는 실컷 바람을 피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북곽 선생이란 덕망 높은 40대 선비를 자기 침실로 불러들인 동리자는 두 얼굴의 여인임이 분명하다. 마치 만공선사를 파계시킨 황진이와 다를 바 없는 처신이다.


 요즘은 이혼을 밥먹듯이 하고, 남편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데도 외간 남자 하나쯤 애인으로 두는 주부들이 없지 않다는 놀라운 세상이니 동리자만 나무랄 일은 아닐지 모르겠다. 이런 여인들을 호랑이는 또 뭐라고 꾸짖을지……. 오죽하면 현대를 일컬어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가 아니라 다부다처제(多夫多妻制) 시대라고 비아냥거릴 것인가.


 

 북곽 선생이야말로 조선 시대의 먹물(識者)들 뿐 아니라 현대의 배운 사람들까지를 대변한 희생양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지조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간이나 쓸개를 빼버린 채 철새처럼 옮겨다니며 강자를 따르는 요즘의 일부 정치인들을 보면, 호랑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호랑이찬가를 부르는 북곽 선생과 오십보백보이려니 싶다.


 호랑이가 자기는 발톱과 이빨만으로도 위엄을 지키는데, 사람은 무기를 만들어 사용한다며 꾸짖는 대목도 현대인이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전쟁을 벌여 신무기 성능을 시험한다지 않던가? 호랑이에게 야단 맞을 사람은 비단 우리나라 사람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른 새벽 일하러 밭에 나온 농부에게 얼렁뚱땅 둘러댄 북곽 선생의 변명은 이 시대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예나 이제나 민초들은 먹고살려고 일터에서 신성한 땀을 흘리지만, 배웠거나 가진 사람들은 비계덩어리를 빼려고 찜질방이나 사우나에서 억지로 땀을 흘린다. 전자의 땀이 폭포라면 후자의 땀은 분수나 다를 바 없다.


 

 조선시대에는 호랑이라도 있어서 그렇게 선비들을 따끔하게 꾸짖었지만 지금은 호랑이조차도 이 땅을 떠난 지 오래다. 그러니 요즘에는 소위 많이 배운 사람과 가진 사람들을 꾸짖어줄 호랑이가 없어서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호질(虎叱)이란 소설이 나온 지 수 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시대에도 역시 호랑이의 꾸짖음은 여전히 필요하려니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