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그리며, 너를 지운다 / 강여울
한 잔의 맥주를 마시고 입술을 핥으며 나는 너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너는 구름처럼 붙들어 둘 수 없는 존재지만 언제고 보려고 하면 보이는 곳에 있다. 깃털처럼 가벼운 네 자유의 향기는 삶의 본능을 일깨운다. 너를 만나는 순간 마음은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오래 너를 느끼고 싶어 한다. 넌 햇솜처럼 부푼 위무의 손을 내민다. 너의 손에서 찐득하게 달라붙은 삶의 찌든 냄새와 먼지와 때가 말끔히 씻겨 나간다. 상쾌해진 나는 남은 너의 체취로 한동안 행복하다.
너는 어디에도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 거침없이 부풀어 오르는 몸을 결코 숨기지도 않지만 한바탕 분탕진 위무의 시간이 끝나면 너는 미련 없이 떠난다. 너는 어디에도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다. 너는 너를 원하는 곳 어디에나 아낌없이 자신을 풀어놓지만 결코 얽매이지 않는다. 네가 품은 것들의 순수가 깨어나는 순간 넌 이미 떠나고 없다. 날마다 넘치는 쓰레기, 오염된 공기, 더 많이 흘릴 수밖에 없는 땀과 피로 순수는 유린당하고 더렵혀진다. 그러면 넌 다시 마술처럼 일어나서 아이를 씻기는 엄마가 된다.
나는 너에게 중독되었다. 하루도 너를 보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너는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 붙잡아 둘 수 없는 존재임에도 늘 함께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 때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지쳐 돌아와 몸을 씻을 때, 심지어 설거지나 빨래를 할 때도 나는 너와 함께한다. 너는 함께하는 짧은 순간에 나의 시름을 덜어주고 땀과 피로를 씻겨서 차분히 그날을 정리하고 잠들 수 있게 한다. 너는 묻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나의 손짓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안다. 네가 떠나고도 나는 한참동안 너를 느낀다. 너는 아낌없이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넌 스캔들에 휘말린다. 너는 거침없이 몸을 부풀려 일을 끝내기 바쁘게 서둘러 사라지기에 세상의 가십거리로 그저 그만이다. 너는 너를 둘러싼 그 모든 가십에도 초연하다. 마치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헤아리는 부모님 같다.
사람들이 너를 가십거리로 삼는 것은 어쩌면 네가 떠난 뒤에 오롯이 남는 깨끗함과 순수를 갈망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그러하듯 모든 사람들은 너를 요술램프 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너는 없는 듯 있다가 비를 내리는 구름처럼 필요한 곳에 무더기로 일어나 쌓인 더러움을 씻어준다. 나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너를 불러내어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내 몸을 씻는다. 네가 머무는 짧은 순간, 부푼 네 몸에 가려진 것들은 더 불순하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정작 네가 사라지고 나면 너와 몸을 섞었던 그것들은 그 전보다 훨씬 유연하고 깨끗해져 있다. 너는 얼마나 즉흥적이며 얼마나 신사적인가. 찰나에 일어나 주위를 휘어잡는 모습은 어쩐지 과장되고 불손해보이기도 하지만, 휘어 잡힌 것들이 말쑥한 새 모습으로 제자리에 놓여 질 때는 그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한 잔의 맥주를 마시고 시원해진 가슴으로 나는 너를 다시 생각한다. 내가 하루도 너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네게 중독된 것은 그만큼 내가 불결해진 탓이다. 세상에 너의 풍문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 또한 이 사회가 깨끗하지 못한 때문이다. 내가 맥주를 마시며 단 한 방울의 너라도 놓칠세라, 입술까지 핥아 삼키는 것은 무진장, 무진장 캄캄해지는 내 마음을 헹궈 아이처럼 순수해지고 싶은 까닭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홀로 계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언젠가 사라질 나도 거품 같은 존재임을 아는 까닭이다. 바다 속 인어공주는 나의 과거였고, 땅에서의 그녀는 나의 현실이고, 거품이 된 인어 공주는 나의 미래이다. 거품, 나는 오늘도 너를 그리며 너를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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