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소유 / 홍억선
필명이 높으신 어느 노작가의 '무소유'라는 글이 오래도록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쫓기듯이 허겁지겁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잠시나마 가쁜 숨을 고르게 하고, 더구나 험지에서 지행합일을 실현하는 작가의 청빈함이 알려지면서 더더욱 깊은 감동을 우려내고 있다. 나 역시 가까운 이웃들에게 이 글을 기꺼운 마음으로 권하여 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아름다운 글을 곱씹으면서 저절로 탄식에 빠져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공단을 옆에 끼고 그저 평범한 소시민들이 수천 세대의 아파트 숲을 이루는 도시의 변두리에 자리하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에서는 한동안 사라졌던 가정방문을 다시 실시하였다. 예전처럼 학부모를 만나 학생의 학업이나 진로에 관한 상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갈수록 세상살이가 어려워져 학비를 감면해 주고 급식비를 지원해 주어야 할 가정이 너무나 많아졌기에 그 현황을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학생을 앞세우고 대문을 들어서면 대부분의 집들은 비어 있었다. 부모들 모두가 인근 공단으로 일을 나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집을 지키는 이가 있다면 거동이 자유스럽지 못하거나 오랜 실직으로 풀이 죽은 얼굴들뿐이었다.
그렇게 서른 명이 넘는 학생 집을 일일이 돌면서 나는 안타깝게도 '무소유' 속에 등장하는 그런 기름진 난초를 본 기억이 없다. 햇볕 잘 드는 베란다라든가 적당히 그늘진 방안에서 주인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난초는 애초에 없었다. 고작해야 언제 걸어놓았는지도 모를 철 지난 꽃다발이 바스라질 듯이 벽에 매달려 있는 것을 두어 집에서 보았을 뿐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까닭 없이 부아가 솟아 죄 없는 학생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무소유'를 대신하여 '소유론'을 설파하곤 돌아왔다.
'무소유'는 '소유'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무엇인가를 가졌기에 버리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별로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소유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가서 얼마만큼의 감동을 줄까.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분들에게 무소유에 관한 글은 지금의 명작 한편으로도 이미 넉넉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명작을 능가할 작품이 나온다면 유쾌히 장려할 일이다. 그런데도 묶어내는 작품집들마다 '무소유'의 아류쯤 되는 글들이 무수히 양산되는 걸 보면 '무소유'라는 글의 영향이 그렇게 심대한 것인지 아니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버릴 것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인지 도무지 까닭을 모를 지경이다.
짐작컨대 '무소유'라는 글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랑을 받는 까닭은, 버릴 것이 있는 분이, 버리고 나서도 견딜 만한 분이, 그리고, 가진 것을 마땅히 버려야 할 분이 쓴 글이어서가 아닐까.
눈만 뜨면 먹고 살 걱정이 앞을 가로막는 시대에, 가진 것이 없으면 한없이 비참해지는 세상에서, 설령 가진 것이 있다 해도 버리겠다는 의지가 눈곱만치도 없으면서 그저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목소리로 무소유를 노래한다면 그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증맞은 일이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무소유'에 버금가는 명작 '아름다운 소유'의 출현을 내내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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