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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몽환적 시월 / 전혜린

몽환적 시월 / 전혜린

 

 

 

뮌헨의 시월이 그립다.

거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게 추운 가을은 처음 보았느니 한국의 가을 하늘을 못 본 사람이 가엾느니 하면서 새파란 하늘,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석류, 추석 보름달,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 등의 이미지와 불가분인 한국의 가을을 그리워했었다. 끔찍한 김장 시즌조차도 못 견디는 향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요즈음 웬일인지 자꾸 뮌헨의 가을이 생각난다.

뮌헨의 시월은 벌써 본격적인 털외투가 필요해지는 계절이다. 한 달 중 20일은 비가 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 안개비, 보슬비 등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뮌헨의 시월이다.

벽이 두꺼운 방안에서 이중창에 세 겹 커튼을 두르고 난로를 때고 앉으면 독서의 계절이라는 슬로건이 없어도 누구나가 마치 회색 안개에 눌린 듯이 생각과 책읽기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살던 슈바빙이라는 뮌헨의 한 구는 일부러 옛날 것을 그대로 좌두는 파리식 예술가촌이었다. 거기서만은 형광등 대신 여전히 가스등이 가로등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저녁때의 짙은 안개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가스등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자건거를 탄 할아버지가 긴 막대기로 유유히 한등 한등 켜가는 박모(薄暮)의 광경은 더욱 몽환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시월이 되면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손님들이 데운 맥주를 요구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추위를 덜기 위해서 그보다 흔히들 마시는 것은 물과 설탕을 끓이고 럼주를 섞은 그로크라는 음료와 붉은 포도주에 계피, 사향, 레몬, 설탕 등을 넣고 끓인 굴류우와인이라는 음료다.

둘다 북극다운 침침하고 검소한, 음악도 없는 뮌헨의 학생 다방에서 마실 때 무척 맛있게 또 추위에 대해서 유효하게 생각된 음료지만 한국에서 마시면 어떨는지? 아직 한번도 시험해 보지 못했다.

아마 그 우울한 안개비의 포장과 뜨거운 사기 난로, 구운 소시지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날라다 주는 금잘발 후로일라인의 친절한 미소 없이는 맛없는 음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