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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버티고(Vertigo) / 정성화

버티고 (Vertigo) / 정성화 

 

 

 

아이 새도우를 바르는 손끝이 떨렸다. 눈썹을 너무 치켜 그리면 팔자가 드세보인다는 말이 생각나서 다시 눈썹 끝을 얌전히 주저앉혔다.  

헤어 스타일은 또 어떻게 하나, 미용실에 가면 한 오 년쯤은 젊어 보이게 해 줄텐데. 망설여졌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 얼굴은 얼굴대로 굵은 허리는 허리대로 여기는 어떻게 할 거냐며 한꺼번에 내게 보채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이 모든 휘둥거림은 며칠 전 받은 전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 정성화씨 댁 맞습니까?”  

“네, 그런데 누구세요?”  

“저...... H입니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일제히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는 한동안 내가 눈부시게 바라보았던 사람이다. 나의 중학교 동창이면서 내가 강의를 들었던 어느 교수님의 동생이었던 그 사람. 그는 늘 유쾌했고 자신감에 넘쳤으며 세련된 매너에 유복한 가정환경까지 갖춘 부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많은 여학생이 그에게 다가서는 걸 보고, 나는 일찌감치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접어버렸었다. 담백한 말투와 태연한 행동으로 그를 견제하며, 친구라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다. 나에게 향한 그의 마음에도 얼마간 핑크빛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도 애써 모른 체 했다.  

간간이 그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내 여고 후배와 결혼했다는 소식에 조금 서운했으나, 아들만 둘에 삼십대의 나이로 대기업의 이사가 되었다는 소식에는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십 사 년 만에 느닷없이 걸려온 그의 전화 앞에서 나는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대답 정도만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 편에 내 연락처와 근황을 알게 되었다며 부산에 가면 한번 만나볼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요, 친구니까 만날 수 있지요.”  

라고 대답했다. 차 한잔 나누는 정도쯤은 그 누구라도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얼른 달력의 약속 날짜에다 별표(★)를 해두었다. 안방에 들어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별이 잘 있는지 먼저 살펴보게 되었다. 그 별은 나의 마음에 어떤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그를 만난다는 설렘에 며칠이 가뿐하게 지나갔다.  

약속한 날 아침, 무사히 해가 뜨고 날이 밝아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도 연신 시계를 보았다.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아 해운대까지 가는 동안 줄곧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풋풋하던 그 얼굴에 중후한 멋을 곁들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니면 여전히 동안(童顔)의 모습일까 하며. 어느새 호텔 로비 앞이었다.  

커피숍 창가 자리에서 한 남자가 일어서며 내게 손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옛날의 H가 아니었다. 갸름하던 얼굴은 둥글넓적해졌으며, 어느새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양복 상의의 앞단추는 곧 튕겨져 나올 듯이 보였다. 예전에 내 가슴을 태우던 그의 모습은 어디로 다 가버린 걸까.  

하늘색 와이셔츠를 산뜻하게 받쳐입은 그의 상의가 왠지 눈에 익었다. 지난 겨울 남편과 내가 백화점 매장에서 몇 번이나 쥐었다 놓았다 했던 바로 그 옷이었다. 비둘기의 목덜미같이 윤기가 자르르한 벨벳 소재의 그 옷을 남편은 꽤 마음에 들어하며 서너 번이나 걸쳐보았었다. 그러나 남편은 계산대로 걸어가며 가격표를 확인해 보고는 그냥 말 없이 옷을 제자리에 걸어두고 나왔었다. 그 때 그 모습이 잠깐 내 마음을 흔들고 지나갔다.  

외모는 변해 있었지만 듣기 좋은 바리톤 음성만은 여전했다. 그는 나에게 아마 여자 동창생 중에서 제일 나이가 안 들어 보일 거라며, 아직도 선생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했다.  

동창들 소식과 은사님에 대한 얘기를 했고, 직장 생활과 가족에 대한 얘기도 두루 나누었다. 이제 남은 얘기는 그와 나 둘 사이의 옛 얘기뿐인 듯 싶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가 뭉그적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얘기든 어서 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그는 이내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동창생 한 명이 위암으로 투병중이면서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서, 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동창회에서 기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동창회장으로서 부탁하는 것이니, 내가 부산지역의 동창회를 맡아 연락을 좀 해달라는 거였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헛바람이 조금씩 빠지면서 내 속은 서서히 쭈그렁 망태기로 변해갔다.  

전투기 추락사고 중 상당 부분이 버티고(Vertigo : 비행착각)라는 착시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하는 바람에, 바다 위를 비행하면서도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여 거꾸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고중력 상태에서 수평 감각을 잃은 탓이다. 내게도 그런 버티고 현상이 일어난 셈이다. 기수를 급하게 돌려야 했다.  

“그래요, 좋은 일하는데 도와야지요.”  

차르르 내려와 눈썹에 걸리는 앞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헤어 드라이값 육천원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가 내민 동창생 명단을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방을 움켜쥔 손바닥에서 땀이 비질비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가 얼른 시계를 보며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했다. 집사람과 같이 왔다며 곧 커피숍에 내려올 테니 어디 가서 함께 점심식사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 한방에 완전히 비틀대는 복서(Boxer)의 모습이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고 싶어하는 엉덩이를 억지로 주저앉히며 나는 간신히 말했다.  

“아니 됐어요. 부부끼리 오붓하게 드세요, 모처럼 부산에 왔을 텐데.”  

부산은 어디 어디가 가볼 만하냐는 그의 말에 나는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 식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괜히 성질을 내고 있었다. 

나는 어서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 녀석의 아름다운 아내와 그 녀석의 행복에 겨운 모습을 보아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래 맞아, 사십대 여자는 까마귀도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했잖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무언가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스타카토의 발자국 소리를 내며 커피숍을 걸어 나왔다.

  “새됐어”  

누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