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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사투리에 대하여 / 정성화

사투리에 대하여 / 정성화   

 

 

내 귀를 보고 있으면 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얼굴에 달려 있는 죄로 오십 년이 다 되도록 투박한 경상도 말만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수를 한 뒤에는 귓바퀴 부분을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준다. 매일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날아와 탕탕 부딪히는데도 나의 귓바퀴는 여전히 그 형을 유지하고 있으니 참 용하기도 하다.  

서울 나들이를 가면 귀가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가 내 귀에 인절미처럼 착착 달라붙는다. 경상도 말은 빠르고 버럭 질러대는 고함 스타일에다 말 줄임이 심하여 되묻기가 일쑤인데 비해, 서울말은 상냥하고 경쾌해서 알아듣기가 쉬웠다.  

기차를 타고 돌아올 때는 눈을 뜨지 않아도 기차가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대강 알 수 있다. 잠결에 들려오는 사투리 때문이다. 느리고 유순한 충청도 사투리가 조용히 오고 가면서 기차 안의 자리 바뀜이 소리 없이 이루어지면 아직 충청도 땅이다. 누군가 지나가면서 팔 다리를 건드리는 일이 잦아지고, 싸우는 듯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이제 기차가 경상도 땅으로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  

이쯤에서 나의 잠은 썰어놓은 김밥처럼 동강이 나게 마련이지만, 잠결에 듣는 그 우악스런 경상도 사투리가 나는 왠지 반갑기만 하다. 그래서 사투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진돗개처럼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동네구나, 우리집에 다 와 가는구나 생각하면서 우리 가족의 얼굴을 차례차례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향 사투리의 힘이 아닌가 싶다.  

사투리는 그 지역 사람들의 기질뿐만 아니라 지형과도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무뚝뚝하고 투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기운을 받은 데다, 경북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내려온 유교적 언어 습관까지 합쳐진 탓이 아닌가 짐작된다.  

또 먹거리에 따라 사람의 기질이 달라진다고 하니, 한결같이 맵고 짜게 먹는 경상도 음식 또한, 고집이 세고 다혈질적인 경상도 기질을 만드는데 한 몫 거들었을 게 분명하다. 말이란 삼키는 음식물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니만큼, 경상도 말은 어쩔 수 없이 ‘간이 센’ 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경상도 말은 좋고 싫고를 분명히 밝혀주는 ‘직거래 화법’을 쓴다. 그래서 때로는 무례하고 오만하며 전투적으로 들린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 넥타이를 풀면서 하는 말이, 다음 날 오전 중으로 큰집에 돈 오백 만원을 송금해 주라는 것이었다. 오십 만원도 아니고 느닷없이 오백 만원이라니.  

“와요?”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요새 행님 댁에 행편이 말이 아닌 갑더라”라고.  

가타부타 아무 대답이 없는 내게 그가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떫나?”  

이것이 경상도식 대화법이다. 알집(Alzip)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압축률을 보이고 있는.  

사투리에는 가슴을 찡하게 하는 그 무엇이 들어있다. 그래서 고향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코끝에 고향의 흙내음과 두엄 냄새가 스친다. 그리고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보이며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의 재잘거림도 들려온다. 우리가 사투리를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그 속에 고향 가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들어 각 지역의 사투리가 문화의 새로운 코드(code)로 뜨고 있다. 표준어가 품질 보증 마크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고 진부하며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데 비해, 사투리는 다소 촌스러운 느낌은 있지만 우리말에 잠재되어 있는 역동성과 생동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표준어에 갇혀 있는 언어적 상상력의 한계를 한순간에 격파하는 자유분방함과 예측 불허의 표현 방식, 그것이 바로 사투리의 ‘개인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투리 속에는 우리들 마음에 난 상처를 달래주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 듯하다. 팍팍한 도시 생활에 지쳤을 때 고향 친구를 만나 진한 고향사투리로 한바탕 떠들어대고 나면, 이내 속이 후련해지면서 마음이 가라앉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사투리 속에는 말의 논리와는 관계없이 사리 판단을 감정적으로 몰아가려는 ‘독(毒)’성분도 들어있다. <토지>에 나오는 ‘임이네’의 거칠고 드센 경상도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사사로운 원한과 치졸한 이해 관계를 어거지로 분장하는데 있어 이렇게 효과적인 언어가 또 있을까 싶다.  

사투리 하면 소설가 ‘이문구’도 떠오른다. 약자들의 삶을 조롱하고 억압하는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수준 높은 해학과 풍자로 비판해온 작가다. 대거리와 어깃장의 수사학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그의 소설은 독자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소설 언어로서 걸쭉한 충청도 사투리를 선택하여 너무나 자유로이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소설 속 대화는 ‘먹물’의 언어가 아니라, 등장인물 자신의 질박한 삶 속에서 늘 쓰고 있던 말, 즉 체화(體化)된 언어였다. 그래서 땅속 깊이 묻어둔 김장독에서 푹 삭은 김치 한 포기를 꺼내 먹었을 때의 맛을 느끼게 한다. 사투리가 문학 속에서 이루어낸 또 하나의 쾌거(快擧)라 하겠다.  

상대방이 공연히 거드름을 피우거나 야비하다 싶을 때, 경상도 사람들은 대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다 때리 치아라”(다 집어 치워라)고 소리친다. 또 상대방에게 분한 마음이 가득하나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궁시렁거리게 된다, “문디, 지랄하고 있네”라고. 이런 사투리들이 비속하고 상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정서를 가장 토속적이면서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해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사투리는 이 시대의 풍속도(風俗圖)를 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색채를 지닌 언어일 것같은 생각이 든다.  

사투리란 그 지역 사람들의 숨결이 한데 어우러져 흐르는 강물과도 같은 것, 어느 지역의 사투리인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각 지역 사투리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지닌 정감과 표현의 다양성을 잘 살려내기만 한다면, 우리의 언어 문화는 더욱 새롭게 번창할 듯 싶다.  

경상도는 물건이 떨어지지 않고 ‘널찌는’ 곳, 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학교에 ‘댕기는’ 학생이 더 많은 곳이다. 또 경상도는 언제 어디서든 ‘쥑인다’ 한 마디면 그 의미가 두루 통하는 곳이기도 하다. 좋을 때도 ‘쥑인다’, 기분이 나쁠 때도 ‘쥑인다’, 감동이 밀려올 때도 ‘쥑인다’이니 그 의미가 무척 심오한 사투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박 삼일의 출장을 간 남편이 딱 한번 집에 전화해서는 “밥 무웃나… 별일 없제… 끊는다이…”하고 전화를 끊어버려도 아무 뒤탈이 없는 곳이다. 옛날부터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싸나이’들과 신의와 절개를 자랑으로 여기는 ‘아지매’들이 모여 사는 곳, 여기는 ‘갱상도’다.  

수더분하게 생긴 한 여자가 거울 앞에서 한 시간째 단장을 하고 있다. 사투리 한 마디면 모든 게 드러날텐데, 잔뜩 공을 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