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 안재진
건너편 아파트 지붕 위로 달이 고개를 내민다. 열이레 달빛은 덜 익은 수박 속처럼 붉다 못해 흰 빛으로 흐려 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결도 그토록 지루했던 여름을 몰아낸 서슬이듯 제법 서늘한 촉감으로 살갖을 더듬는다.
이대로 앉아 있기에는 이 밤이 너무나 숙연하다. 어릴 때 밤새도록 지축을 흔드는 대포 소리에 놀라 잠을 설치며, 피난길을 꾸리던 어른들 곁에서 마음을 졸였던 그런 기분이다.
무엇에 홀린 듯 밖으로 나왔다. 어지럽게 휘청거리는 큰길을 벗어나 무작정 걷다보니 금호강 둔덕에 이르렀다.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는 강둑은 회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희붐하게 졸고 있고, 길섶 풀 더미 속에서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혹은 간드러진 노래인지 알 길이 없다. 아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보니 눈물이 베어 있는 마지막 만찬의 소나타인지 모른다.
멀리 어둠 속에 침적해 있는 강심에도 죽음 같은 정적이 깔려 있다. 몇 몇 낚시꾼들이 드리운 간드레 불빛이 아니라면 영락없는 세상 밖의 세상을 연상케 했다. 다행히 그 속에 달빛이 머리를 풀고 들어가 있다. 곱게 빗질을 하고 어디론가 긴 나들이를 떠날 모양이다.
그렇다. 오늘 낮에 모두가 바쁜 몸짓으로 어딘가 길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 산자락에 있다는 와촌 들녘에는 여름내 곱게 손질한 황포옷을 꺼내 입고 무언가 미련이 남아 있는 듯 한쩟 고개를 숙인 벼 포기들이 한참을 수런거렸다. 박사리를 가로지르는 좁은 고갯길 언저리에는 만개한 갈꽃과 억새꽃이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애잔하리만큼 가쁜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 무리 속에 듬성듬성 자리 잡은 코스모스 꽃은 화사하게 단장은 하였지만 짙은 애수가 금시 차가운 눈물로 뚝뚝 떨어질 듯 보였다.
나는 이 기막힌 연회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보일 듯 말 듯한 풀섶 한 자락을 비집고 앉아 그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른다.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놈의 알량한 감각과 생각으로 죽도록 허세나 부리다가 끝내는 질퍽한 오욕만 남기고 떠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토록 찬란한 마지막 축제에 끼이지도 못한 채 한낱 불청객이 되어 가슴 아파한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이 무슨 자력이듯 나를 얽어, 오후 내내 풀섶을 헤집고 다니다가 결국 해질 무렵에야 돌아설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마음은 편치 못했다. 그곳에서 묻혀온 바람과 길 떠날 준비를 하는 생명들의 수런거림이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고 무슨 환청처럼 방안 가득히 넘치는 것이었다. 대문에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는 달빛에도 가슴이 아렸고, 그런 달빛을 받으며 정처 없이 피난길을 떠나야 했던 암울한 시절도 떠올랐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남쪽지역이라 9월이 되어서야 전쟁을 실감했다. 낮에 움직이면 위험하다는 소리에 두더지처럼 깊고 으슥한 자리만을 찾아 깊이 잠적하였고, 대신 밤이 깊으면 죽을힘을 다해 길을 걸었다. 그렇다고 정확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찾아나서는 막연한 걸음이었다.
그때 그 달빛이 얼마나 해맑았던지. 이미 생기를 반이나 잃은 잡목을 헤집고 걷노라면 달빛은 어느새 거뭇거뭇한 가지를 밀치고 우리와 동행하였다. 또 어쩌다 언덕 한 자락을 의지한 채 쉬고 있노라면 달빛은 금시 설움에 겨운 붉은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그때의 달빛을 받으며 강둑에 앉아 있다.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곳이라 달빛은 더욱 차갑다. 그 빛살에 씻기듯 파리한 모습으로 모두들 길을 떠나려는데 나만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렇게 서글픈 전송객이 되어 풀밭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9월은 참으로 가슴을 쥐어짜는 달이다. 마치 어느 한적한 시골 간이역에서 머잖아 떠나보내야할 사람들을 앞에 두고,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눈물 흘리는 그런 아픔이 서린 달이다. 물론 세월이 차면 언젠가는 달빛보다 곱고 청아한 모습으로 수목들은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이별하는 손짓은 쓰리다.
그러데 아무리 새잎이 돋고 꽃이 피어도 결코 돌아오지 못하는 생명도 있다. 그건 바로 인간의 생명이다. 그래서 이 밤 강 언덕의 스산한 바람에도 이렇듯 애잔한 기분에 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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