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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전봇대는 아프다 / 정성화

전봇대는 아프다 / 정성화 

 

 

 

칠십대의 노점상 할머니가 대통령의 가슴에 기대어 울고 있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매일 자정쯤 시장에 나와 열 두 시간동안 시래기와 무청을 주워 팔아도,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고 한다. 우는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대통령의 표정도 무척 착잡해 보였다.  

사는 게 너무 고달파서 한바탕 울고 싶던 사람들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사진이다. 사진 속 배경이 된 배추더미는,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잠깐 잠이 든 시장 상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졸린 눈빛으로 배추를 내려다보던 알전구들은 갑작스런 대통령의 행차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새벽이라기엔 어둠이 너무 두터워 보여 아침이 쉬 올 것 같지 않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그러하듯이.  

국민소득이 십 년 만에 최대 폭으로 감소했다더니 어느 노숙자는 따뜻한 교도소에 가고 싶어 일부러 절도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 세상이 마치 빈 쌀독처럼 느껴진다. 내가 정말 복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어른들 말 때문에 자다가도 가위에 눌리곤 했었는데, 어른이 된 뒤로는 걸핏하면 경제 위기나 구조 조정을 들먹이는 사회 분위기에 눌려 나도 모르게 소심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다. 정말 이 힘든 시절을 병풍 접듯이 쉽게 접을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상황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전봇대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급매, 급전세라는 전단지를 바람에 흔들어 보이며 점차 부동산 값이 하락할 거라고, 눈물의 고별전이니 ‘창고 대방출’이라고 적힌 전단지를 내걸며 몇 개의 공장과 회사가 곧 문을 닫을 거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보고도 무시했거나 무신경하게 보았을 뿐이다. 여기저기 남아있는 벽보 테이프 자국과 떼다만 전단지 자국, 그리고 남의 전단지 위에 겹쳐 놓은 구직 광고를 보니 왠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손 닿는 데까지 전봇대에는 빈 곳이 없다. 힘든 이들이 그래도 믿고 의지할 데는 전봇대뿐인 모양이다. 그래서 전봇대는 세상을 읽어주는 책이 되고 있다. ‘빈 방 있음’, ‘법원 경매’, ‘하숙생 구함’, ‘무담보 싼 이자’, ‘아기를 봐 드립니다’, ‘치매환자 돌봐드림’, ‘명문대 출신이 명문대 보장’ 등. 전단지들끼리 서로의 끝을 잡아주며 세상의 바람을 견디고 있다, 이런 게 가족이라는 듯이.  

전봇대에 이 시대 가장(家長)들의 모습이 들어있다. 전봇대가 어깨에 둘러맨 덩치 큰 변압기는 가장들이 먹여 살려야 할 부양가족으로, 전봇대가 열 손가락 벌려 붙들고 있는 전선줄은 가장들이 보살펴야 할 부모 형제와 친지로 보인다. 끊임없이 전단지가 날아드는 것까지 닮았다. 공과금 고지서, 관리비 납부서, 보험료 청구서, 학원비 봉투, 공납금 납부용지 등.  

전봇대의 하루는 참는 것에서 시작되어 참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느닷없이 돌을 던져 전봇대의 전등을 깨는 사람, 다짜고짜 전봇대의 아랫도리를 걷어차는 사람, 전봇대의 종아리에다 질금질금 오줌을 싸는 술 취한 남자들까지. 아마 이 시대의 가장들도 자신의 ‘전봇대’가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참아내고 있을 것이다. 제 식구들에게 하루 세끼 밥이라도 먹이려고, 자식들 하던 공부라도 제대로 마치게 해 주려고 오늘 하루도 부처님보다 예수님보다 더 많이 참으면서 견디고 있을 것이다. 너무 낡고 삭아서 뽑아내기 전에는 바닥에 드러누울 수도, 그 어디에 기댈 수도 없는 전봇대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가장(家長)들이다. 바람이 세차게 부니 전선줄들이 일제히 요동을 친다. 그 순간 전봇대는 전선줄을 더 팽팽히 부여잡는다.  

때로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들이 시합을 마친 권투선수가 몸에 잔뜩 부치고 있는 ‘파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봇대처럼 의연하게 보였겠지만, 이 시대의 가난한 가장들은 그동안 자기 몸 하나로 맞고 때리며 돈을 벌어 왔다. 권투가 위험하다고 링에 오르지 않는 복서는 없다. 맞고 또 맞아도 위축되지 않으며 상대방의 주먹 속으로 더 파고드는 게 복서다. 어쩌면 그는 지금 이 시간에도 찢어진 눈덩이를 손으로 가린 채, 다음 시합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는지 모른다.  

번개탄 두 장을 집어 삼키고도 불이 제대로 붙지 않는 연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대장간에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쇠덩이를 쇠망치로 두들겨 연장을 만든다. 쇠망치로 내려칠 때마다 쇠가 단련되기 때문에 백번 이상을 두들겨야 좋은 연장이 된다고 한다. 우리의 경제 상황이 이렇게 힘들어진 것도, 어쩌면 우리를 좋은 연장으로 만들기 위해 하늘이 두드리고 있는 게 아닌지. 아프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희망이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전 직원이 아침부터 전봇대에 올라가 수리를 하고 있다. 한 시간도 더 되었다. 전봇대가 많이 아픈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