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 장나영
마당이 훤하다. 대문 밖을 내다보니 밤새 하얀 세상으로 변해있었다. 이른 새벽에 오고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골목길을 저만치 걸어 나가 상황을 살펴본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가며 내 발도장을 찍고 뽀드득거리는 소리에 상쾌한 마음이 되었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와 화단 옆 단지 위에 소담스럽게 쌓인 눈을 두 손으로 걷어 뭉쳐 보았다. 손으로 눈을 둥글리면서 이렇게 많이 쌓인 눈길에 어떻게 출근할까 걱정하다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 두 정류장 거리쯤 걸어야 학교에 도착하는데 갈 길이 암담하다. 머플러를 칭칭 감고 무장을 하고 평소 출근 시간보다 일찍 나서야겠다.
지하철에서 나오자 차도 옆 보도길은 사람들 발길에 꼭꼭 다져진 눈길이 되어 있었다. 한발 한발 조심스레 걸어가는데 내 앞을 걸어가던 아이가 주르르 미끄러진다. 나는 얼른 “괜찮니?”하며 묻고 손을 잡아 일으켜준다.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은 게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힌다. 아이는 다친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옷 털어라”하며 따스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일어나 엉덩이의 눈을 털며 수줍어하는 아이의 모습을 뒤로 하고 내가 앞서 걸어가 주었다. 이 시간 가방을 든 그 아이는 학교나 학원에 가는 길일 게다. 방학 중 수업을 하러 가는 나도 눈이 와서 힘 드는데 오늘 같은 날 아이도 공부하러 가는 길이 힘들겠다.
가로수 길가에는 눈이 차바퀴에 밀려서 반쯤 녹아 아이스 슬러쉬처럼 되었다. 얼릴 적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이 엄마는 쌀이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빙설이라면 좋겠다고 했다. 요즘 아이들은 빙설이 아닌 오렌지나 포도 아이스슬러쉬를 컵에 담아 먹는다. 분식점과 문구점을 지나며 오늘 같은 날도 아이들은 얼음과자 생각이 날까하는 생각을 한다. 보도에 눌러 붙은 눈 위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소복이 눈이 쌓인 곳에 발자국을 찍으며 학교로 향했다.
교문에 들어섰다. 눈발이 날리는 운동장은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밤새 쌓인 눈에 높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아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위에 쌓인 눈꽃을 구경하며 현관 정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 현관 유리문이 밖으로 밀리며 한 아이가 튀어 나와 나를 보며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벙그레한 얼굴이다.
“샘, 눈 왔어요!”
처음 보는 아이인데 내게 안기는 느낌이다. 장독대에 쌓인 눈을 뭉쳐 엄마에게 내밀던 때처럼 아이는 내게 눈이 와서 너무너무 좋아라고 외친다.
“그래 많이 왔구나!”
아이의 기뻐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어준다. 평소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 외에 다른 선생님께는 의례적인 인사말이나 목례를 하거나 때론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눈이 온다고 알리고 싶은 아이의 눈망울은 맑고 깨끗하다. 학교에 일찍 달려와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눈이 온 것을 축하하고 싶었나 보다. 나도 오늘 아침에는 대문 앞 눈길을 밟으며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수업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 반 아이들도 한 둘 모여든다. 모두 공부는 하기 싫고 놀고 싶다는 표정이다. 수업 시작해도 몇 몇 아이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양볼이 빨개져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남학생들은 손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서로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는 게 심상찮다.
“뭐꼬? 퍼뜩 밖에 안 갖다 놓나! 책 다 베리면 공부 못 한데이~!”
아이들은 뭉쳐온 눈이 들통이 나서 아깝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이왕 뭉쳐온 것이라 아이들은 내게 던질 듯한 모습이다.
“말 잘 들으면 수업 일찍 마치게 해준다. 밖에 나가서 눈싸움 실컷 해라. 좋제?”
나는 아이들보다 먼저 말로 선수를 쳐서 뭉쳐온 눈을 피하기 위해 구슬렸다. 속셈이 들통이 나버린 아이들은 이번에는 수업을 마치고 같이 놀아주실 거냐고 협상하듯 묻는데 나는 수업시간에 말 잘 들으면 생각해 본다 했다. 그러고는 틈을 안주고 책상 위가 물바다 된다고 빨리 눈뭉치를 밖에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눈뭉치는 내 차례를 비켜 갔는지 이제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에게 눈길을 슬그머니 돌린다. 여학생들도 눈뭉치가 자기들 차지가 될까 싶어 나보다 목소리를 더 높인다. 남학생들은 눈뭉치를 두 손에 이리저리 바꿔가며 들며 여학생들에게 약을 올린다. 빨갛게 손이 얼어 있으면서도 뭉쳐온 눈이 버리기가 못내 섭섭한지 망설이다 뒷문으로 나가 복도 화분 위에 올려놓는다. 창문가에서 겨울나무에 눈이 내려앉는 것을 구경하던 화분도 아이들 덕분에 눈에 덮히는 복을 누리게 됐다.
수업시간 내내 아이들은 눈이 펑펑 내리는 창문을 바라본다. 뭉쳐온 눈보다 더 큰 눈덩이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행복할 것 같다. 오늘 같은 날 밖에서 놀지 못하고 공부하느라 교실에 붙들려 있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나도 수업을 빨리 마치고 눈길 위를 뽀드득 소리 나게 밟으며 발도장을 콕콕 찍으며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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