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 권화송
현대 불교의 큰스님이신 성철 스님이 자주 쓰시던 법어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이다. 유명한 스님이 자주 쓰시는 까닭으로 이 법어가 마치 불교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었다. 이 법어로 하여 불교가 대중화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다면 좋으련마는 이 법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드물다.
지식인과 학자, 심지어 불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대학 교수는 강의 시간 중에 말하기를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성철 스님의 법어를 미루어 보아도 불교는 별 것 아닌 것이다. 불교도 결국 현실을 떠날 수 없고, 현실 밖에 진리가 따로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의아했다. 현실 밖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불교라면, 스님들이 몇 생에 걸쳐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수도를 하며, 석가불께서 육 년 동안이나 고행하며 설산(雪山) 수행을 하였겠는가?
이 법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불교가 현실을 위한 종교로만 안다면 불교가 크게 폄훼되는 결과인지라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이 법어를 참구할 기회가 생겼다.
대구불교문협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서 시인이면서 선수행에도 일가를 이루신 K 교수의 ‘깨달음과 선시’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K교수는 조사들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했다.
“선사들의 법어는 깨달은 경지를 말하고 있는데 깨치기 이전의 일반인들은 일상적인 시선으로 일상적 경지를 바라보면서 미감(美感)으로 접근하려고 하고 있다. 선사들의 말 한마디는 일상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큰 불더미와 같고, 선의 세계를 두고 크고 작은 것을 가리고 좋고 나쁜 것을 언어로 분별한다면 목숨을 잃은 행위와 같게 된다”고 했다. 엄청난 말씀이었다.
그의 발제문에 의하면, 옛날 당나라 때, 길주(吉州) 청원선사(靑原禪師)가
“노승이 30년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그 뒤 어진 스님을 만나 깨침에 들어서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산은 역시 그 산이요 물도 역시 그 물이었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이냐 서로 다른 것이냐? 만일 이것을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노승과 같은 경지에 있음을 내 허용하리라”
라고 했을 때, 불교에서 깨치는 단계가 3단락을 이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보통인의 오관의 눈으로 보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둘째 단계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이다. 일반인들이 오관으로 보는 현상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산은 산이 아님도 아니오, 물도 물이 아님도 아니오. 곧 산도 역시 그 산이요, 물도 역시 그 물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삼단론법은 헤겔의 변증법(辨證法)과 유사한 데가 있다. 헤겔은 부정(否定)을 통하여 정신이 진리에까지 높아지는 과정을 변증법이라 했다. 긍정과 부정을 거쳐서 즉 정(正)과 반(反)의 변증법적 사변을 되풀이 하면서 합(合)이라는 초월적 경지를 체득하기에 이른다. 깨달음은 두 번째인 현상계를 철저히 부정하는 단계에서 절정을 체험하고 그 충격으로 셋째 단계에서는 현실 세계와 조화를 이루어 안정을 얻기에 이른다. 깨달음의 불꽃 속에 모든 망상과 탐진치(貪嗔癡)가 녹아버린 청정한 법신의 안목으로 바라보는 산과 물은 깨닫기 전 범부의 눈으로 바라보던 산과 물의 원관념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보통인의 상식으로는 ‘산은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견해에는 잘 납득이 되지 않겠지만, 이 부정론은 현대과학에서도 증명되는 것이다. 현상계에 있는 모든 사물은 영구불변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눈 앞의 허공 중에 우뚝히 솟은 저 뫼봉우리도 흙과 돌의 미립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가건물과 같은 것이다. 현대과학에서는 모든 물질은 분자의 결합으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이 분자는 원자로 구성되었고 원자를 분해하면 궁극으로 전자와 양자로 결합되었다고 한다. 이들 극소 입자들도 궁극의 결정체가 없어서 고도의 기술로 분해하면 기화해서 진공이 된다고 한다. 결국은 진공상태 즉 에너지화 한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산하대지(山河大地)도 고정된 실체가 없는, 본질에서는 진공이라고 보는 것이다.
언어로서는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길도 끊어진 깨달음의 경지는 알음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참구 끝에 직관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불꽃 같은 섬광으로 심신이 활짝 열리는 찰나에 일체개공(一體皆空)을 체득한다고 한다. 공(空)을 체득했지만 공에만 머무르면 이 또한 공착(空着)이 되어 막히는 길이므로 공(空)마저 버리고 회광반조(回光返照)하여 현실로 돌아오고 보니, 눈 앞에 있는 ‘산은 역시 그 산이요, 물은 역시 그 물인 것이다’ 이 경계가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은 본래의 고향에 돌아온 경지라 하겠다.
위의 법어와 같이 선문답에는 삼단론법으로 된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만물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갑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하는 물음에 조주(趙州)스님은 “내가 청주에 살 때, 무명옷을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라고 대답했다. 만물은 우주 간에 현실로 인연따라 나타내 보이는 모든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은 고정된 실체가 없이 진공을 바탕으로 하여 한량없이 생멸을 거듭하며 인연을 좇아 묘유(妙有)로 찰나에 생겨나 진공 속에 숨바꼭질하는 양상이므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가듯 궁극의 귀일처(歸一處)인 하나는 무(無)요 진공일 수 밖에 없다. 진공에서 묘유로 펼쳐지는 삼라만상의 형태 중에 한 인간의 개인적인 삶도 포함되는 것이다. 조주가 청주에 있을 때 일곱 근 나가는 무명옷을 지어 입었다는 사실보다 더 개인적인 삶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철저한 개인적인 사건이야말로 하나로 연계되는 눈앞에 벌어진 현실로서 하나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개별일 뿐이므로 결론으로 얻은 법어 ‘산은 산, 물은 물’에 해당되는 말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이란 나와 너가 합일하는 것이며 자신과 우주가 계합하는 공명 현상이라고 한다. 모든 분별심과 생각이 끊으지고 주관과 객관이 하나되는 무아(無我)와 텅 빈 공(空)의 찰나에 즉 즉물삼매경(卽物三昧境)에서 번뜩이는 불꽃을 체험하는 것이라 한다. 물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부단한 3 단계적인 수행의 과정을 겪었던 결과물인 것이다.
내가 항상 지니고 염송하는 법어에는 ‘어생일각(魚生一角) 학삼성(鶴三聲)’이란 것이 있다. 일반인이 보는 물고기에는 뿔이 없는데 2단계의 수행을 거쳐 불꽃에 끄을린 눈으로 바라보면 물고기에 뿔이 하나 나있는 도리를 볼 수 있으리라. 이 뿔로 하여 탐진치(貪嗔癡)에 오염된 일반인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학은 중도와 초월의 상징이다. 불자들이 청정한 삶을 살아가려면 학의 울음을 좇아 3단의 수행을 거쳐 가슴 속 뿔 하나씩 묻고 능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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