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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침묵하라, 그러면 보일지니 / 이현희

침묵하라, 그러면 보일지니 / 이현희

 

 

 

12월의 덕수궁에는 겨울나무들이 빈 그림자로 누워 있었다.

나무는 제 쓸쓸함에 겨워 삶의 고단함을 털어놓는 바람에 계절이 주고 간 서글픈 기억일랑 이제 그만 다 잊으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내 속의 내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나를 잊어버리는. 그날의 내가 꼭 그랬다. 그래서 난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일 수 없었다.

나는 기대했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해병우 사진전에서 그가 담아온 맑고 깊은 솔향기로 내 마음이 좀 정화되고 내면의 조용한 숲길을 걸으며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또한 잃어버린 나늘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더구나 이번 전시회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최근작까지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전시였으므로 그에 따른 기대감도 사뭇 높았다.

해병우는 1950년 전남 여수 출신으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복학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남도 지방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다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가 소나무를 찍게 된 계기는 사진작가로서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 해메던 중 1985년 낙산해변에서 보았던 소나무로부터 이것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것 중의 하나이며 우리의 문화와 역사 곳곳에서 다양한 의미와 상징성을 띠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20여 년간 오로지 동일한 주제인 소나무에만 주목해온 결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약간의 설렘을 안고 소나무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역시! 그의 작품들은 일반적인 자연 찬미의 사진과는 달랐다. 뭐랄까 사유의 공간을 깊이 들여다 좋고 있었다.

추상화처럼 지극히 단순한 선과 곡선만으로 대상의 이미지를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충분히 드러내며 나아가서는 보는 이마저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알 것 같았다. 왜 그의 사진들이 국내외적으로 크게 인정받는지를. 특히 이 사진 앞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