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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1

[좋은수필]자목련 심은 마당 / 김인기

자목련 심은 마당 / 김인기

 

 

 

내가 사는 동산동의 언덕에는 백여 년 전에 지었다는 선교사들의 주택 세 채가 자리 잡았다. 바로 선교사 스위즈주택, 선교사 챔니스주택, 선교사 블레이어주택이다. 예전에는 삼일길을 따라 담장으로 막혀서 일반인들과 무관한 장소였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누구나 쉬이 접근할 수 있다. 일전에 내가 여기에서 오른팔을 둥글게 저으며 아내한테 물었다.

“이렇게 하면 몇 평쯤이나 될까요?”

이제는 선교박물관(宣敎博物館)이 된 선교사스위즈주택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랬다. 내가 아내한테 이 집의 정원도 포함한 넓이를 물은 것이다. 아내도 나도 이런 걸 잘 가늠하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대략 오백 평쯤 될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내 생각에 이런 정도의 주택이라면 소박하다. 도시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아옹다옹하는 터라 서민들이 이런 걸 넓게 알지만, 이게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내가 아내한테 이런 제안을 했다.

“나중에 우리는 칠백 평 정도의 땅에 집을 적당한 크기로 지읍시다. 이백 평은 밭을 만들어서 상추도 심고…….”

이게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돈도 없는 내가 태연자약하게 이런 계획을 말하니까, 자목련을 닮은 아내는 또 탄복을 한다. 매사가 이렇다. 그러나 누구라도 생각마저 당장의 조건으로 구속하면 더 큰 문제가 아니랴. 내가 사사롭게 바라는 바도 엄밀하게 따지면 조촐하기 짝이 없다. 하기야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 많이 시달렸다. 그래서 아내도 착각한다. 그렇다고 어느 가족의 생활이 겨우 이런 수준으로 사치스러울 리는 없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의 책 <건축을 향하여>에서 탑형(塔型) 도시를 언급했다. 이 책의 초판이 1923년에 나왔으니까 벌써 8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내 생각으로도 대도시에 탑형의 거대한 구조물들을 몇 개쯤 지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게 하고 나머지 공간에는 도마뱀과 여우가 놀게 버려두는 것도 좋겠다. 이미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에는 높이가 444미터에 이르는 건물이 있다니까,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시공에 문제가 될 게 없지 않겠느냐.

‘그러면 우리들의 정원은 바로 이 지구일거야.’

나는 때때로 신기하다. 이런 탑형 도시만 해도 어릴 적에는 누구나 몇 번쯤 상상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현대건축에서 그렇게나 중요한 인물이 아이들이나 생각하는 이런 걸 이렇게 까지 그림으로 그리며 구체적으로 구상하였다니, 이런 걸 보면 뷔지에의 이런 구상도 건축으로 실현하려면 많이 검토해야 하겠으나, 이 또한 즐거운 일일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란 글을 읽었다. ‘건축가는 공학자가 아니다.’ 당시에 나로선 이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도 그렇게 동의한다. 역시 그 말마따나 그들은 공학을 이해하는 인문학자이다. 그 구상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이다. 어쩌면 영화에서 시나리오와 촬영만큼이나 건축학과 공학은 서로 다른 게 아닐까. 이러면 건축가들을 미학자나 시인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한때 나는 건축가들을 부러워했다. 아름다운 집을 설계하는 게 근사하게 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나는 굳이 자신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한편으로 나는 이미 건축가라고도 믿는다. 물론 이런 내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을 터이다. 공학(工學)을 모르는 내가 건축가는 아니니까. 그러나 건축과 수필이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공학을 이해하고자 노력은 하겠지만, 내 조건으로는 아마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탑형 도시를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누가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공학자들이라면 누군가의 상상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를 고민할 것이다. 더러는 나와 같은 이들의 생각이 그들에게 자극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다. 내가 쓰는 이 글을 누가 읽고 집을 짓는다고 하자. 그러면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이 글에는 건축가가 참고할 만한 게 전혀 없거나 너무 많은 것이다. 건축이 되려면 그 구성요소를 정해야 한다. 기둥은 물론 벽이나 지붕을 무엇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방은 몇 개나 필요하냐? 그러나 이 글에는 이런 게 한 마디도 없다. 대신에 이 글에는 행간마다 내 체취가 자욱하다.

건축의 발전 또한 문학의 향기를 필요로 한다.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어떻게 배치하고 바람과 햇살과 별빛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뛰어난 건축가들은 고민할 것이다. 문학이 보이는 판타지를 그들은 물질로 조성하는 작업에 골몰할 것이고, 그들은 여기에서 얻은 영감으로 새로운 건축을 꿈꿀 것이다. 이런 건축과 대화하는 문학 또한 행복하다.

나는 전망 좋은 집에서 표정도 맑게 살았으면 졸겠다. 이런 소망이 시시하다. 내가 드러내는 바가 그렇다. 과연 나는 그저 그런 인간이다.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의 면모를 모르는 건축이 제대로 된 것이겠는가? 아직도 내 꿈은 자목련 몇 그루 심은 마당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게 일상을 영위하는 내 모습이다. 나는 그저 이런 줄이나 잘 알아서 남들에게 짐이나 되지 말아야지. 그간 내 생각이 모자라서 폐단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게 나 혼자만의 꿈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