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 / 이희승
우리 문화의 특징으로서 가장 현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친구가 있기에, 나는 ‘멋’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그런데 ‘멋’이 무엇이냐고 또 다시 묻는 이가 있다면,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똑떨어지게 꼬집어 대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 동포로서 우리 강토 안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멋’ 이란 말만 들어도, 옳거니 하고 입귀가 씽긋하며 두 어깨가 추여지는 어떠한 일종의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즉 회의(會意)랄까,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랄까. 설명 없이도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외국 사람이 이것을 물을 때에는, 한 마디 해답이 없을 수 없다.
‘멋’ 이란 첫째, 우리에게 쾌감 이상의 쾌락을 주는 것이요, 쾌감 이하의 담박미(淡泊味)를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 중국의 풍류보다는 해학미가 더하고, 또 서양의 ‘유머’에 비하여 풍류적인 격이 높다. 일본의 ‘사비’는 담박성은 가졌다 하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오종종하고 차분한 때를 벗어 버리지 못하였고, 그 ‘아와레미’ 에서는 ‘멋’에서 볼 수 있는 무돈착성(無頓着性)을 찾을 길이 없다. 어쨌든 ‘멋’은 주책없는 듯, 헐게 빠진 듯, 미치광이 같은 면이 있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소박성, 순진성, 선명성, 첨예성, 곡선성, 다양성 등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을 나는 한마디로 통틀어 ‘흥청거림’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멋’이 말에 나타나면 익살이 되고, 행동에 나타나면 쾌사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멋’은 실용적이 아니다. 다른 민족에서 볼 수 없는 우리 고유한 의복의 고름은 옷자락을 잡아매기 위하여 생겼을 터이나, 필요 이상으로 무작정 길어서 걸음 걸을 때나 바람이 불 적마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펄렁거리며 나부끼는 그 곡선의 비상(飛翔)이야말로, 괴로움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쾌락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것일 것이다. 술띠도 댕기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고려자기 물주전자의 귓대가 종착없이 길어서 물을 따르려면 뚜껑을 덮은 아구리로 넘을 지경이니, 실용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발뿌리와 별다르게 버선과 신코가 뾰죽하고, 인두코가 또한 그러하다. 저고리 회장이 홀태가 되고 섶귀가 날카로우며, 추녀가 위로 발룩 잦혀진 것은, 이것이 다 ‘멋’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이 ‘멋’의 요소는 ‘흥청거림’과 ‘필요이상’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흥청거리는지라 통일을 깨뜨리고 균제(均齊)를 벗어나서 책의 사이즈가 백 가지로 다르고, 일분의 다다미나 쇼오지(障子)에 비하여, 우리 건축의 간사리나 창호(窓戶)가 얼마나 각양 각색인가. 참차 불일(參差不一)이요, 무질서라 하겠다.
오늘날은 과학 만능 시대다. 그런데 과학은 ‘멋’과 아주 배치되는 것이다. 필요와 규격만을 아는 것이다. 이 필요는 원자탄을 낳았고, 그래서 인간은 과학병으로 신음, 전율하고 있다. 인류는 이 병으로 죽느냐, 고치고 살아나느냐가 앞으로의 과제요, 고치려면 과연 어떠한 약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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