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그 들녘에서 / 조낭희
들길을 걷는다.
길은 있는 듯 없는 듯 잡목 숲 아래까지 겸손하게 이어져 있다. 들과 길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도록 풀은 돌맹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 길섶으로 물러섰다. 봄을 맞는 분주함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를 위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쓸쓸했던 논두렁이나 계곡에서도 봄기운이 왕성하다.
봄은 어느 사이 성큼 자라 있었다. 우리가 무언가에 열중했거나 집착하고 있었을 무렵 연둣빛 들녘은 자기만의 색깔을 빚기 위해 인고의 노력을 했었다. 나는 부서지는 별빛과 바람의 채찍이 잉태한 푸르른 신의 작품 속으로 들어갔다.
봄맞이꽃이 피었다. 계단식 밭둑 옆에 여름밤 하늘의 별들이 내려 앉은 듯 분부시다. 안쓰럽도록 여린 얼굴들이 도란도란 정겹다. 이들을 위해 봄은 안개처럼 허리를 낮추고 대지를 품었으리라. 봄맞이꽃의 미소가 닫혀진 빗장을 열고 성큼 내 안으로 들어온다. 무리 지어 일어서는 풀과 나무들.
양탄자처럼 펼쳐진 토끼풀 무리 속에 앉아 네 잎 클로버를 찾는다. 뚜렸한 목적도 없이 눈을 빛내며 네 잎 클로버를 찾던 시절이 있었다. 내 눈에 띌 때 비로소 기쁨이 되던 희귀한 네 잎, 행운아란 말에 막연한 설렘이 실리곤 했다. 졸업 후의 불확실한 미래와 결혼이라는 미지의 세계 앞에서 초조해질 때 나는 희망 속에 행운을 꿈꾸어 왔던 것 같다. 그것은 젊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며 방황이기도 했다.
지금은 부족함이 없어서 행운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즐거움 뒤에 따르기 마련인 복병을 경계하며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행운 앞에서 섣불리 쾌재를 부르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며, 시련 앞에서 담담하고 초연해져야 한다는 지혜도 삶이 가르쳐 준 것들이다. 행운에 기대를 걸지 않는 삶은 얼마나 박동적인가.
행운이란 말을 내 삶에서 떼어놓았듯, 한때는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고 생소하거나, 멀게 느껴지던 것들이 친숙한 일상이 되어 있음에 놀랄 때가 있다. 세월에 떠밀려 변화되어 가는 나를 만나는 일은 까닭 없이 슬프다. 삶은 수많은 결별을 통한 허무의 연속이며 끊임없는 잉태의 연속이기에 더러는 엄숙해지기도 하는 것을.
나는 세월을 되감으며 클로버 무리를 뒤지다 더할 수 없는 안온함으로 클로버 무리를 쓰다듬는다. 아침 설거지에 부딪치는 사기그릇들의 여명처럼 일상의 자잘한 마찰들이 따스하게 울려 온다. 촘촘한 클로버 무리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에 잎 클로버처럼 행운은 그렇게 찾아오는 법이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4월의 끄트머리에 앉는다. 클로버 꽃향기가 코 끝을 간질이는, 흡사 아기 걸음마를 지켜보는 느낌이 드는 계절 속에서 나는 흙이 되고, 바람이 되고 말 피어나는 들꽃이 된다.
이 들녘엔 모두가 행운을 기다리는 주인공이다. 자식을 떠나 보낼 때가 되었는지 머리 햐얀 민들레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바람을 기다린다. 강인한 어머니처럼 애잔한 꽃. 삶의 질서와 깊이, 그리고 인고의 세월이 보인다.
꽃을 피울 때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다가 씨앗이 여물 무렵 있는 힘을 다해 줄기를 밀어 올리는 눈물겨운 모성애. 가만히 민들레 줄기를 꺾어 입술이 떨리도록 불어 본다. 새로운 영토에서 굳건하게 삶을 펼칠 민들레의 앞날에 행운을 비는 마음도 실어 보낸다. 행운이란 말에 담긴 그 환함과 평화로움이 나를 감싼다.
그 동안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행운을 기원했던가. 때로는 스스로를 위한 만족과 위안에 그쳤을지라도. 행운은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쓰여질 때 빛을 발한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지금 내 안에서 여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성을 다해 민들레 씨앗을 분다. 사랑도 아픔도 모르는 깃털 같은 씨앗들이 하늘을 난다. 생명을 실은 채 어미 곁을 떠난다.
민들레의 잘려 나간 줄기에서 하얀 슬픔이 듣는다. 생명 있는 것들은 제각각 삶의 좌표를 따라 물 흐르듯 싶다가, 결국은 한줌의 위로를 받으며 사라져 갈 것이다. 빔 몸이 된 민들레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소유하기 위해 살아가는 듯한 일상들이 수치처럼 느껴진다. 잊고 지내던 것들과의 우연한 조우. 그것은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며 나를 변화시킨다. 박하사탕처럼 퍼져 오는 이 봄의 메시지들처럼.
모두가 우리 지어 있는 들길을 혼자 걷는다. 들길은 혼자 걸어야 외롭지 않다. 자연은 소란함 속에서는 결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와 풀들은 침묵하고 만다. 나는 무리 속에서 홀로일 때의 자유를 만끽한다. 여리면서 강하고 작으면서 큰 생명의 속삭임을 듣기 위해 나는 귀를 기울인다.
끊임없이 속살대는, 왕성하게 꿈틀거리는 대지의 기운을 누가 막으랴. 바람이 보리밭에 숨어서 장난을 친다. 사랑하는 이의 숨결과도 같은 부드러움으로 내 볼을 스치더니, 멀리 잡목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산이 시작되는 초입에서 키 큰 은사시나무들이 일제히 반짝인다. 비늘 같은 몸짓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그들, 그들도 무리 지어 있었다.
4월, 그 들녘에 무리 지어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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