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힘들었군요 / 권준우
나는 시력이 나쁘다. 오죽하면 입대 신체검사에서 난시로 4급 판정을 받았을까. 렌즈 교정이 쉽지 않아 근시보다 난시가 더 골치 아프다. 난시 전용 렌즈가 있기는 하나 불편하다는 평이 많아 동료 안과 의사들도 "웬만하면 라섹 수술을 받으시죠."라고 말하곤 했다. 수술을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보니 시간이 꽤 흘러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살고 있다. 안경 쓴 것이 불편할 때는 운동할 때뿐이다. 스노보드를 탈 때 안경에 김이 서리거나 수영할 때 사람들 구분을 할 수 없는 것은 꽤 불편하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미용실에서 내 머리카락이 잘 다듬어지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 정도다. 헤어스타일에 큰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라, 그럭저럭 무난하게 깎아주기만 하면 같은 헤어샵을 계속 고집한다. 붙임성이 좋지 못해 깎아주는 분과 농담도 별로 안하는 데, 미용 보조를 하는 아가씨와는 머리를 감겨준 것이 계기가 되어 조금 친해지게 되었다. 샴푸를 하는데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기에 “여기서 일하신지 얼마 안 되셨나봐요?”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꽤 오래 됐는데요?”한다. 그동안 내가 무관심해서 몰랐던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샴푸를 너무 조심스럽게 하기에 얼마 안 된 줄 알았다고 해명했고, 머리를 다 깎은 후 두 번째 샴푸 타임에서 그녀는 내 무관심에 대한 답례로 아주 시원하게 빡빡 머리를 감겨 주었다. 그 후로도 그녀가 계속 내 담당 헤어디자이너의 보조를 했고 매번 시원한 샴푸로 내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줬다. 요즘은 헤어샵도 경쟁이 치열한지 서비스가 좋아졌다. 샴푸를 하고 앉아있으면 어깨도 가볍게 풀어주고 머리 손질이 끝나면 손맛사지도 해준다. 그날도 그녀가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내 손을 마사지해주기 시작했는데, 문득 그녀의 손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손 전체가 거의 다 갈라져 드문드문 점점이 피가 배어나왔던 자국이 있던 것이다. “손 왜 그래요?” 하고 물었더니 “이제 아셨어요?”라는 물음이 되돌아온다. 또 내 무관심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무관심보다 안 좋은 시력 탓을 하고 싶었다. 안경을 벗은 상태에서는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손의 상처가 안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녀 손의 상처는 미용 일을 시작하고 나서 생겼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주부습진’이었다. 하루 종일 손님의 머리를 감겨주다 보니 샴푸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아지고, 물에 젖었다 말랐다 하면서 계속 살결이 거칠어진 것이다. 딴에는 의사라고 뭔가 조언을 해주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치료법이라는 게 참 한심했다. ‘손 자주 씻지 말고 비누나 샴푸 같은 거 조심하고 연고 좀 바르시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해주는 건 참 쉽다. 하지만 그 중에서 머리 감겨주는 미용보조가 지킬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징그럽죠? 하루라도 쉬면 좀 나아져요. 근데 쉬지를 못해요.”일주일에 딱 하루, 수요일에 쉰다고 한다. 자신이 따르는 헤어디자이너가 쉬는 날에 자신도 쉬는 것이다. “그럼 샴푸하는 건 언제 그만해요? 보조일 끝나면 안 해도 되잖아요?”라고 물으니 앞으로 한 2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한단다. 그동안 그녀는 또 매일 머리를 감겨줄 것이고 손의 상처는 더욱 깊어갈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녀는 손맛사지를 끝내고 내게 인사를 하며 웃는다. 한창 예쁘고 싶을 나이일 텐데 ‘징그럽죠?’라고 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세상에 참 쉬운 일은 없구나. 나만 힘들게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누구나 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나도 그녀의 미소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저렇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을 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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