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안재진
이형!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모르지만 수필이 문학의 변방으로 폄하되는 내용을 전해들은 나로서도 불편하기 그지없소. 그런데 긴 세월을 수필과 함께 살아오고, 가장 의미 있는 문학으로 생각하며 긍지가 대단했던 이형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힘든 분노를 느꼈으리라 생각하오. 하지만 그런 무책임한 편견을 듣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요. 자신이 전공한 장르만이 문학의 전부처럼 생각하며 그릇된 객기를 부리는 사람이 더러 있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문학의 본질이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엉뚱한 망상에 젖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오. 그래서 이형처럼 문학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며 정열을 쏟고 있는 사람들은 오다가다 듣게 되는 헛기침처럼 의미를 두지 않는 게 아니오. 그런데 무슨 연유가 있었기에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긴 편지를 보내면서까지 마음을 아파하는 건지 알 수 없구려.
설령 제법 이름 있는 시인이나 평론가가 그런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게 우리를 슬프게 만들지는 못할 거요. 그 역시 얼치기 시인이나 자기 독선에 몰입하여 평론의 본질을 훼손하는 사람일거요.
사실 무엇은 문학이고 무엇은 문학이 아니라는 완벽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 옛날 한문으로 엮어놓은 작품도 우리의 소중한 고전문학으로 수용하고, 심지어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한 것도 구비문학으로 소중히 가꾸고 있는데 수필이 문학이 아니라는 극단적 논리는 그 사람의 문학적 인격을 의심할 일이지 결코 수필인들이 흥분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
‘칼라일’ 은 말하지 않았소. 문학은 생각하는 영혼의 사상이라고. 그리고 ‘미케일’ 은 가장 훌륭한 목적으로 정돈되고, 가장 강력한 힘과 가장 위대한 재능이 구상되었으며, 그것이 증발하거나 잊히지 않도록 기록된 보다 더 좋은 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이라 부른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소. 결국 문학이란 성격상 분류한 시나 소설, 평론이나 수필 같은 장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과 사상으로 의미를 정돈하고 채워 독자들로 하여금 영혼을 자극하고 가슴을 떨리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아니겠소.
아무리 이름이 있는 문학인이라 해도 그가 지향하는 의도가 권력의 문학, 지식의 문학, 상업의 문학, 우상과 명예의 문학이라면 그는 내제와 표피가 다른 사기꾼에 불과할 뿐이오. 이러한 허명에 놀아나는 철없는 사람의 철없는 소리를 듣고 놀란다는 우리 또한 진정한 문학인의 자세가 아니라 생각하오. 지난 시절 꽁꽁 갇혀 있던 여인들의 절절했던 삶을 혼으로 풀어놓은 가사가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을, 우리가 문학의 격식이나 구성으로 평가하지 않고 오직 가슴으로 흔드는 그것만으로도 귀하게 이해하는 것처럼 장르 자체가 문학의 시비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오.
그리고 우리 수필인들도 스스로가 어느 자리로 어떤 자세로 서 있는가를 한 번쯤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오. 과연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가, 또는 태생적 허약성을 얼마만큼 극복하고 있으며 어떤 자세와 얼마만큼의 고뇌로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말이오. 사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 이라는 그릇된 이론에다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여가 선용 성격으로 쓰여진 글들이 수필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것들이 수필의 자리를 흐리게 한 것은 아니었는지? 더구나 작금에 물밀듯이 쏟아지는 추천작가들이 과연 얼마만큼 고민하며 문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문학의 개론이나 원론의 습득도 없이 청소년기에 젖었던 문학 소년의 감정만을 내세워 느지막이 허술한 제도쪽 고리를 잡은 것을 기회로 삼아 수필인으로 자처하며 도취하는 경향은 없는지? 또한 그들이 아픈 마음으로 문학에 접근하며 정성으로 글을 발표하고 있는지?
내가 보기에는 결코 명쾌한 분위기는 아니라 생각하오. 옛 금언에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제 진지하게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한 것이 일부 사람들에게 편협한 인식을 갖게 된 것보다 더 심각한 괴로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소. 물론 나 스스로도 그런 문제에 진지하게 고민한 일은 별로 없었으며, 따라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절박한 회의감도 없지 않소.
이형은 그래도 자타가 공인하는 수필인이 아니오. 나 역시 이형의 작품을 교본처럼 마음을 주고 있소. 그러므로 형의 문학적 업적도 중요하지만 이직은 설익어 보이는 수필문학의 안착을 모색하는 일도 소홀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오. 그만큼 수필문단에 차지하는 형의 비중이 지대하기 때문이오. 또한 그 길만이 얼치기 문학인이 제멋대로 나불거리는 더러운 입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오.
여하튼 이형의 언짢은 기분이 곧 나의 기분이오. 모든 수필인들의 감정이지만 철없는 입놀림에 맞대응하는 것은 어른이 할 품새가 아니라 생각하니 그냥 지나치는 바람소리거니 하고 관심을 버리시길 바라오. 그리고 이 여름날 한껏 벙그러진 생명처럼 많은 것을 일깨워 주는 형의 신작을 고대하고 있소. 건강을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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